“역설적이게도 ‘관객의 기억에 남지 않는 자연스러운 분장’이 가장 훌륭한 분장이라 할 수 있죠. 관객이 배우의 연기에 몰입해야지, 상투에 꽂힌 비녀, 턱을 타고 흐르는 수염에 시선을 둬서는 안 되잖아요? 분장은 배우와 한 몸처럼 자연스러워 절대 튀지 않아야 해요.”
영화 속 ‘천의 얼굴’을 만들어 내는 조태희(40) 분장감독은 자신의 분장 철학을 이렇게 설명했다. 수염 한 올 한 올을 심듯이 붙여넣고, 가발을 만들 인모를 찾아 방방곡곡 수소문하는 수고를 마다치 않지만 그 노력은 드러나지 않을 때 진정 빛나는 셈이다.
<광해: 왕이 된 남자>(1232만명), <사도>(625만명), <역린>(385만명), <남한산성>(385만명), <박열>(236만명), <안시성>(544만명)…. 내로라하는 사극영화 속 얼굴을 탄생시킨 조태희 분장감독이 우리나라 최초로 분장 관련 콘텐츠를 전시하는 ‘영화의 얼굴창조전’을 열었다. 지난 17년 동안 그의 손을 거친 15편의 영화 속 500여점의 소품이 전시된 서울 종로구 인사동 아라아트센터에서 지난 2일 조태희 감독과 마주했다. 그는 “분장을 시작한 뒤 2주간 첫 실습을 나간 작품이 임권택 감독의 <춘향뎐>(2000년)이었는데, 그 때 사극의 매력에 빠져 커리어가 사극으로 흐른 듯 하다”고 말했다.
영화 <사도> 속 영조(송강호) 겹짜기상투관. 하늘분장 제공
이번 전시회에는 총 4개 층에 걸쳐 분장도구와 사전 스케치, 가발이나 수염, 비녀와 상투·망건 등 분장과 관련된 작품이 총 망라돼 있다. 영화판에 뛰어들었을 때부터 “언젠간 꼭 분장 관련 전시회를 열겠다”는 꿈을 가졌던 조 감독이 지난 2012년부터 모으기 시작한 것들이다. “대부분의 분장감독은 영화 속 소품을 업체에서 협찬받아요. 한정된 예산으로 모든 걸 해결해야 하니 경제적으로나 시간적으로 그편이 훨씬 유리하거든요. 하지만 전 전시를 염두에 뒀기에 모두 자체 제작하는 걸 원칙으로 했어요.” 분장컨셉을 잡고, 장신구 디자인을 구상하고, 제작을 의뢰하고, 샘플본을 보고 다시 수정하면서 촬영 전 준비 기간 두 달 정도를 포함해 한 작품당 7~8개월을 쏟아붓는다.
전시품 중 브러시나 퍼프 등의 분장 도구엔 이병헌·현빈·송강호·고수 등 출연 배우들의 이름이 각각 각인돼 있다. “작품에서 만나는 배우마다 전용 분장 도구를 따로 준비해 이름을 새겨둬요. 다음 작품에서 만나면 다시 사용하는 식이죠. 이렇게 각인 된 분장 도구가 한 200세트 정도 있어요.”
영화 <광해: 왕이 된 남자> 속 광해(이병헌)의 용주물 조각 비녀. 하늘분장 제공
겉으로 보기엔 그저 비슷비슷한 사극용 수염이지만, 하나하나 뚜렷한 컨셉과 차이가 있다. 예를 들어 <사도> 속 영조(송강호)의 수염은 40대, 50대, 60대, 70대까지 총 네 개의 기간으로 나눠 제작됐다. <남한산성> 속 최명길(이병헌)의 수염은 화친(평화)파의 특성이 드러나도록 가늘고 길게, 척화파 김상헌(김윤석)의 수염은 굵고 거칠게 만들었다. “우리가 자고 먹는 하루 동안에도 수염은 끊임없이 자라요. 장면마다, 인물의 성격마다 디테일한 차이를 만드는 거죠. 사실 배우들 협조가 없으면 불가능해요. 수염을 붙이면 담배를 피우거나, 물을 마시기도 어려우니까요.”
분장은 인내와 끈기의 산물이다. 각기 다른 수염을 만들기 위해, 영화 컨셉에 맞는 가발을 만들기 위해서는 오랜 시간이 걸린다는 게 조 감독의 설명이다. “일단 수염은 머리를 땋을 때처럼 땋는데, 얼마만큼 땋느냐에 따라 웨이브의 굵기가 달라져요. 이걸 물에 불려 전자레인지에 여러 번 찌는 거죠. 파마와 비슷하죠?” 최근 들어서는 가발을 만들 인모를 찾는 일이 고역이다. “고구려를 배경으로 한 <안시성>에서는 남자인 사물(남주혁)도, 여자인 시미(정은채)나 백하(설현)도 모두 머리 길이가 76㎝(30인치)를 넘었어요. 요즘 한국에선 그렇게 긴 인모가 드물어 중국·베트남까지 뒤졌죠. 하하하.”
영화 <박열>의 이제훈 컨셉드로잉. 하늘분장 제공
자연스레 떠오르는 궁금증 하나. 영화 제작 현장에서 의상팀과 분장팀, 소품팀의 경계는 어떻게 나뉘는 걸까? “목 윗부분은 분장, 그 아래로는 의상으로 보통 나눠요. 하지만 의상을 벗고 맨몸이 나오면 그건 또 분장의 몫이죠. 충무로에서는 이렇게 설명해요. 칼을 휘두르는 액션신에서 피가 묻은 게 의상이면 의상팀, 바닥에 묻으면 미술팀, 칼에 묻으면 소품팀, 얼굴에 묻으면 분장팀 관할이라고요. 하하하.”
분장감독에게 가장 힘든 일은 ‘고증’과 ‘창작’의 갈림길에서 균형을 잡는 일이란다. “고증에만 집착하면 영화에 천편일률적인 머리 스타일과 장식품만 등장하겠죠. 그래서 전 창작에 좀 더 방점을 찍는 편이긴 해요. 영화는 결국 상상력과 창조의 산물이니까요.” 끊임없이 역사학자나 역사연구 단체 등에서 항의 전화를 받는 것은 결국 분장감독의 숙명이다. “가채가 이상하다, 머리 장식품이 근본 없다 등등 셀 수 없이 많죠. 설명하느라 난감한 적이 많아요. 하하하.”
사실 전시를 하기까지 이렇게 많은 장식품과 소품을 보관하는 것도 큰 과제였다. 파손되거나 분실되는 일을 가급적 줄이려면 이사를 덜 해야 하는데, 쉽지 않았다. “임대료가 비싸도 지하는 절대 안 돼요. 해가 잘 드는 2~3층을 얻어야 했죠. 처음 4평짜리 창고에서 시작해 40평까지 몇 번이나 이사를 했는데, 마지막엔 거의 테트리스 게임을 하듯 포개어 보관했죠. 옮기면서 파손되거나 금속 소품에 지문이 묻어 안 없어질 때는 속이 쓰리더라고요.”
수많은 전시품 중 가장 사연이 많은 작품은 무얼까? “모두 자식 같은 작품이지만, 굳이 꼽자면 <광해> 속 ‘용 주물 조각 비녀’가 제일 애착이 가요. 한국에서 처음으로 왕의 머리 비녀에 용을 얹는 시도를 한 작품인 데다 애초 욕심대로 주물을 떠 제작하니 무게가 700g이나 나가 10분의 1로 줄이느라 꽤 고생했거든요. 무엇보다 <광해>는 분장감독으로서의 제 이름을 많이 알리게 해 준 작품이기도 하고요.”
스무살에 그저 분장이 좋아 뛰어든 영화판에서 17년을 보내며 그는 ‘선배’로서의 의무를 많이 생각하게 됐다고 했다. 이렇게 전시회를 연 것도, 국내 유일의 분장회사인 하늘분장을 만들어 ‘주 52시간 노동과 월급제’를 실천하는 것도 다 그런 이유다. “힘들다며 포기하는 후배들이 많아요. 저는 대학을 나온 것도, 인맥이 있는 것도 아니고 혼자 밑바닥부터 여기까지 왔잖아요? 한 우물을 끈기 있게 파다 보면 오래오래 할 수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어요. 일흔까지 흰 머리를 휘날리며 현장에서 뛰는 게 목표예요. 그리고 그 결과물을 모아 분장 박물관을 세우는 게 꿈입니다.” 4월23일까지. 연중무휴.
유선희 기자
duck@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