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칠곡 가시나들>의 한 장면. 인디플러그 제공
“빨리 죽어야 데는데/ 십게 죽지도 아나고 참 죽겐네/ 몸이 아푸마 빨리 주거여지 시푸고/ 재매끼 놀 때는 좀 사라야지 시푸다/ 내 마음이 이래 와따가따 한다.”
89살 박금분 할머니가 삐뚤빼뚤한 글씨에 사투리로 써 내려간 시를 읊는 장면에 다다르자 “까르르” 웃음이 터져 나왔다. 경북 칠곡군 약목면 복성2리에 사는 ‘평균나이 86살 가시나들’이 커닝도 하고 농땡이도 피워가며 한글을 배우고, 배운 것을 십분 활용해 투박하지만 솔직한 시를 쓰며 노년의 설렘을 즐긴다. 그 소박하고 담담한 일상을 담은 100분 동안 객석에서는 때론 웃음보가, 때론 눈물보가 터졌다. 엔딩크레딧이 다 올라가고 극장 안에 불이 켜질 때까지 먼저 자리를 뜨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었다. “할머니들 멋져요”라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려왔다.
지난 8일 서울 동작구 사당동 아트나인에서 열린 영화 <칠곡 가시나들> 단체관람 행사는 특별했다. 이 영화를 응원하기 위해 <문화방송>(MBC) 김민식 피디가 자신의 사비를 털어 페이스북과 블로그를 통해 90명을 모아 개최한 행사였기 때문이다. 김 피디는 “애초 70석짜리 상영관을 마련했지만, 2시간 만에 마감돼 미처 신청을 못한 사람들의 문의가 빗발쳐서 90석 규모로 늘렸다”며 “불금에 다른 약속이 생겨 못 오는 분들이 많을까봐 사실 걱정했는데, 영화관을 빼곡히 메워주셔서 행복하고 감사하다. 이렇게 좋은 영화가 5월 가정의 달까지 계속 스크린에 걸릴 수 있도록 함께 응원해달라”고 인사를 했다.
김민식 PD, 사비로 단체관람 마련 가득 메운 관객 “할머니들 멋져요”
이어진 지브이(GV·관객과의 대화) 행사에는 이 영화를 만든 김재환 감독도 함께했다. 김 감독은 “저는 투자자가 없다. 영화가 안되면 혼자 망하면 되기 때문에 용기 내서 멀티플렉스의 횡포에 맞섰다. 오늘 지명된 신임 문화체육관광부 장관 후보자의 이력을 보니 씨제이 사외이사 출신이더라. 고양이에게 생선을 맡긴 격인데, 앞으로도 똑똑히 지켜봐야 할 것 같다”고 말했다.
지난 8일 동작구 사당동 아트나인에서 열린 영화 <칠곡 가시나들> 단체관람 행사. 단관행사를 마련한 김민식 엠비시 피디(왼쪽)와 이 영화를 만든 김재환 감독. 단유필름 제공
영화 <칠곡 가시나들>을 둘러싸고 해묵은 ‘멀티플렉스 횡포’와 ‘스크린 독과점 논란’이 일고 있다. 앞서 지난달 25일 김재환 감독은 이 영화에 대해 고작 8개의 상영관을, 그것도 퐁당퐁당 교차 편성한 씨제이씨지브이(CJ CGV)에 대해 ‘보이콧’을 선언하는 입장문을 발표하며 논란에 불을 지폈다. 전국 159개 극장, 1182개 스크린을 보유한 업계 1위 씨지브이는 비슷한 시기 <사바하>에는 906개, <극한직업>에는 840개의 스크린을 배정했다. <칠곡 가시나들>과 비슷한 규모(제작비·홍보비)인 <어쩌다 결혼>에도 140개 스크린을 배정했다. 세 영화 모두 씨제이 계열사인 아트하우스와 씨제이이엔엠이 투자배급한 영화다.
하지만 김 감독이 씨지브이에 이어 17개 관을 배정한 메가박스마저 보이콧한 이후 <칠곡 가시나들>은 3만명이 넘는 관객을 동원하며 선전하고 있다. 올해 3만명 고지를 넘은 한국 다양성 영화는 이 작품이 유일하다. 지난 4일 이 영화를 관람한 김정숙 여사가 8일 여성의 날을 맞아 칠곡 할머니들에게 정성스러운 선물을 전달한 것은 물론, 소설가 김훈, 코미디언 배연정, 배우 안석환, 김민식 피디, 보컬 그룹 바버렛츠 등 유명인들도 이 작품에 지지와 응원을 보냈다.
영화 <칠곡 가시나들>의 한 장면. 인디플러그 제공
“관객 선택권 보장 차원 수요공급 논리”
멀티플렉스의 ‘단골 변명’ 무색하게
흥행 순항…각계 지지 응원 줄잇고
‘스크린 상한제’ 등 조속통과 촉구
이 영화의 선전이 영화계에 던지는 파장은 결코 작지 않다. 그동안 ‘스크린 독과점과 멀티플렉스 횡포’ 논란이 불거질 때마다 멀티플렉스들은 “관객이 원하는 작품에 스크린을 많이 배정하는 것이 수요공급의 논리에 맞는다”는 변명을 단골로 내세웠기 때문이다. 이번 사태에 대해서도 씨지브이 관계자는 “스크린 수 배정은 향후 다시 조정할 수 있다고 했는데도 김 감독이 보이콧을 선언하며 대화에 응하지 않은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칠곡 가시나들>의 선전은 흥행 여부가 결판이 나지도 않은 상태에서 스크린을 쥐꼬리만큼 배정하며 내세우는 멀티플렉스의 얄팍한 논리가 자가당착임을 증명한다.
그동안 비슷한 상황이 벌어질 때마다 늘 ‘영화 및 비디오물의 진흥에 관한 법률’(영비법)의 개정을 주장하는 목소리가 따라붙었다. 지금까지 국회에 발의된 영비법 개정안만 해도 도종환 문체부 장관이 의원 시절 발의한 ‘도종환 안’을 비롯해 ‘안철수 의원 안’ ‘조승래 의원 안’ 등 여럿이다. 내용과 정도에 조금씩 차이는 있지만, 이들 개정안의 핵심은 프랑스처럼 ‘멀티플렉스에서 같은 영화를 일정 비율 이상 상영하지 못하도록 한다’는 ‘스크린 상한제’다. 여기에 상영 횟수, 시간대, 좌석 수 등을 고려해 프라임 시간대에도 다양한 영화가 상영될 수 있도록 하거나 영화 배급과 상영을 동시에 하는 ‘대기업 수직계열화’를 해소하도록 하는 등 더 강경한 내용이 덧붙여진다.
영화 <칠곡 가시나들>의 한 장면. 인디플러그 제공
영화계에서는 이번 <칠곡 가시나들>의 사례를 계기로, 이미 발의된 영비법 개정안의 조속한 통과를 촉구하는 목소리가 높다. 지난달 28일 김재환 감독을 지지하는 영화인들이 ‘이 땅의 양심과 상식을 함께하는 영화인 연대’라는 이름으로 성명을 내어 “(김 감독이) 씨지브이의 독점적 지위와 부당한 관행에 대해 공개적으로 문제를 제기한 만큼, 불공정 관행을 타파할 수 있는 법률 개정을 촉구한다”고 밝힌 것도 같은 맥락이다. 영화진흥위원회 역시 지난 7일 씨지브이와 메가박스에 질의서를 보내 “이번 사안은 ‘최소 1주일 이상 상영 기간 보장과 교차 상영 등 변칙적인 상영행위 방지’를 합의했던 동반성장이행협약을 명백히 위반하는 조치”라고 지적하며 15일까지 입장을 밝히라고 요구했다. 김혜준 영진위 공정환경조성센터장은 “<칠곡 가시나들>을 계기로 영비법 개정안 등 현안 논의를 위해 멀티플렉스도 함께 참여하는 논의 테이블을 구성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한켠에선 한-미 자유무역협정 위반과 위헌 소지 등의 이유로 논의가 지지부진한 ‘영비법 개정안’ 통과 대신 정부가 다양성 영화를 직접 지원하는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는 주장도 나온다. 정상진 엣나인필름 대표는 “스크린 상한제를 시행하려면, 프랑스처럼 정부가 멀티플렉스에 그에 상응하는 반대급부(예산지원)를 줘야 하는데, 돈만 대준다고 다양성 영화 관객이 늘어나는 것은 아니다. 차라리 정부와 지방자치단체가 나서 규모가 작은 다양성 영화 전용 상영관을 많이 짓고, 다양성 영화의 유통·배급·홍보·마케팅을 지원하는 정책적 접근을 하는 것이 효과적인 방법”이라고 주장했다.
유선희 기자
duck@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