팝콘&콜라
1960년대 후반. 보릿고개란 수식이나 어울리는 까마득한 시절이지만 그때야말로 한국 영화의 전성기였다. 숱한 멜로로 반도가 들썩였다. 1969년엔 1억7천만명이 넘게 극장을 찾았다. 전 국민 5~6명에 한 명씩, 거의 한 집마다 한 편 꼴로 극장을 찾은 셈이다. 한 해 동원 관객수로 역대 최고치다. 해마다 200여 편 정도가 새로 만들어졌고, 문희, 윤정희, 남정임으로 묶이는 ‘여배우 트로이카’가 찍은 영화만도 1000편에 이르렀으니, 이 영화 저 영화가 본치도 좋게 차려졌었다. 극장이 새 영화를 다 감당하지 못했다.
지금이야 볼 거리, 먹을 거리가 넘치는 때라 영화로 절박해지진 않으니 단순 비교할 순 없는 노릇이다. 그래도 100만명 관객 시대를 열어 젖힌 93년도, 1000만명 관객 시대를 연 2004년도 69년을 앞서지 못했다는 건 놀랍다. 심지어 1965년부터 71년까지의 한 해 관객 동원수, 그 어느 것도 앞서지 못한다.
그 잠재력과 내공을 단칼에 벤 게 바로 검열이다. 영화사의 산 증인이라 할 김수용 감독은 최근 펴낸 회고록에서 “이 시기의 영화 검열은 가장 악랄하고 가혹하게 한국 영화 감독들의 창작 의욕을 분쇄했다”고 설명한다. 북한군을 미화했다는 이유로 중앙정보부에 끌려간 <7인의 여포로>의 이만희 감독은 “김일성 앞에서 이 영화를 틀겠소. 영화를 본 그가 나한테 훈장을 주나 총살을 시키나 후세에 전하시오”라고까지 했다지만, 작품은 결국 조각조각 뜯겼던 조악한 시대다. 그리고 한국 영화는 오랜 빙하기에 접어들었다.
‘제 2 전성기’라는 표현이 무색하지 않을 만치 한국의 2005년 영화판이 살갑게 막을 내리고 있다. 30여년 만이다. 씨지브이(CGV)는 영화산업분석 자료를 통해 12월말까지 올 한햇동안 전국적으로 1억4천만명 이상(지난 11일까지 1억3400만명 집계)이 극장에 몰릴 것이라고 내다봤다. 역대 7위 규모다. 관객몰이 순으로도 <웰컴 투 동막골>(800만명)을 위시로 한 한국 영화가 상위군 20편 가운데 14편이나 된다.
하지만 벌써 한국 영화가 식을 것을 염려하는 목소리가 적지 않다. 여러 이유 가운데 하나는 중정의 검열에 견주게 되는 이른바 제작진의 ‘자기 검열’이 아닐까. 말인즉 대개의 대작들이 기존의 관습적 흥행 공식만 스스로 답습, 복제하고 있는 실정을 꼬집는 것이다. 2000년대 들어 흥행한 대개의 영화들이 민족주의적 정서에 기대는 북한 소재나 극대화한 가족주의의 틀 따위에서 크게 벗어나 있지 않다. 인기를 끈 장르도 대개 드라마나 코믹으로 제한된다.
김수용 감독은 “한국 영화의 고질적 체감온도는 늘 바닥을 멤돌았다. 그만큼 영화는 본질적으로 상업성과 예술성의 냉엄한 이중 구조를 바탕으로 하며 자생력 외에는 살 길이 없다”고 고언한다. 150억원을 들인 <태풍>이 개봉 2주만에 주춤하는 이유는 상업적으로 익숙한 흥행 코드만 나열한 탓이다. 몇몇의 공식들이 관객의 입맛을 길들이지만, 완전히 길들여지면 이내 다른 맛을 찾게 되는 게 순리다.
임인택 기자 imit@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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