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준호 감독. 씨제이이앤엠(CJ ENM) 제공
“<기생충>이 제 영화 중에 베스트냐고요? 글쎄요…. 저도 남의 영화 볼 땐 그런 의문을 가졌던 것 같아요. 작년에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이 <어느 가족>으로 황금종려상을 받았을 때, 마음속으로는 ‘아, 그래도 <걸어도 걸어도>(2008)가 최고지’라고 생각했어요. 이 대답은 좀 더 차분하게 올 연말쯤 해도 될까요? 하하하.”
자신의 일곱 번째 영화 <기생충>으로 칸국제영화제 황금종려상을 거머쥔 봉준호 감독(50)과 29일 귀국 후 가진 첫 인터뷰를 공격적인 질문으로 시작해봤다. 다작하진 않지만 <살인의 추억>, <마더>, <괴물>, <설국열차>, <옥자> 등 대중성과 작품성을 고루 갖춘 굵직한 필모그래피를 써 내려 가고 있는 봉 감독은 살짝 당황하면서도 “중이 제 머리 못 깎는다고 아직 제 작품에 객관적인 잣대로 대답을 못 하겠다. 다만, 다른 작품에 견줘 상대적으로 만들고 난 뒤 미련은 덜 했던 것 같다”고 덧붙였다.
말 그대로 ‘봉준호의 시대’다. 대한민국에서 그의 시대가 열린 지는 꽤 오래됐지만, 이제 그의 시대는 전 세계로 확장됐다. 벌써 칸에 이어 아카데미 감독상·각본상 수상까지 점치는 보도가 나오고 있는 터다. 한창 들 떠 있을 법도 한데, 봉 감독은 “칸은 이미 과거의 일이 됐다. 지금은 국내 관객의 반응이 무척 궁금하다. 살짝 변장하고 일반 관객에 섞여 영화를 볼 작정”이라고 했다.
<기생충>은 가족 전체가 백수인 기택(송강호)네 장남 기우(최우식)가 부잣집 박 사장(이선균)네 집에 과외선생으로 가게 되면서 벌어지는 예측 불가 사건을 그린다. ‘광대가 나오지 않는 코미디, 악당이 나오지 않는 비극’이란 봉 감독의 설명처럼, 한국 사회의 고질적 ‘계급 격차’ 문제를 코미디, 스릴러, 파국적 비극이라는 다양한 장르 사이를 절묘하게 오가며 담아낸다.
사실 <기생충>의 시작은 ‘연극 각본 구상’이었다. 지난 2013년 <설국열차> 후반 작업을 하던 중 봉 감독은 평소 친했던 배우 김뢰하로부터 ‘연극 연출을 해 볼 생각이 없냐’는 제안을 받았다. “연극 소재를 생각하다 보니 공간적으로 단순한 구조를 생각하게 된 거죠. <기생충>은 이야기의 90%가 기택네 반지하와 박 사장네 고급 주택에서 이뤄지잖아요. 처음부터 가난한 가족과 부자 가족으로 대표되는 이야기를 떠올렸죠. 꼬리 칸과 머리 칸으로 대비되는 설국열차와 연장선에 있으면서도 좀 더 우리 살갗에 와 닿는 작고 디테일한 이야기를 하고 싶었달까.”
‘계급 격차’를 드러내기 위해 촬영할 때도 디테일에 많은 신경을 썼다. “홍경표 촬영감독과 ‘빛의 빈부 격차’에 집중했어요. 자연광이 잘 들지 않는 반지하와 거대한 전면 창으로 종일 비치는 고급 주택. 그 대비 자체만 해도 좀 슬프지 않나요?” 영화 속에 계속해서 등장하는 다양한 ‘계단의 이미지’도 이와 연결된다. <설국열차>가 수평적인 이미지로 표현되는 불평등이었다면, <기생충>은 수직적 이미지로 표현되는 불평등인 셈이다. “반지하 세트에서 화장실만 계단 위에 올라가 있잖아요? 실제 반지하에는 ‘정화조 역류’를 막기 위해 그런 형태의 화장실을 지어요. 누리꾼들이 ‘응가의 제단’(웃음)이라고 자조하며 올린 이미지가 많죠. 나중에 홍수가 나서 반지하가 잠길 때 쏟아지는 비와 물도 수직적 불평등을 나타내는 중요한 이미지 중 하나고요.”
영화 속 ‘냄새’는 또 하나의 중요한 ‘소재’다. ‘냄새’는 영화 전반을 지배하며, 결국 분위기를 반전시키는 중요한 매개다. “냄새는 인간의 가장 내밀하고 사적인 부분이죠. 부부 사이에서도 냄새 이야기를 하기가 쉽지 않잖아요? 인간이 지켜야 할 선과 예의, 무례함을 잘 드러내요. 영화 속 기택 가족의 직업인 자동차 기사 등은 부자와 가난한 자가 사적 거리를 좁히고 마주하고 서로의 냄새를 느낄 수 있는 유일한 직군이에요. 요즘 보도되는 갑질 사건이 대부분 자동차 안에서 벌어지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죠.”
개봉 전에 너무 큰 상을 받은 터라 오히려 <기생충>에 관한 자유로운 ‘갑론을박’이 이뤄지기 힘든 상황이 아니냐고 물었다. “황금종려는 제가 뭘 잘 못해서 받은 상은 아니잖아요? 하하하. 그냥 주어진 거니까. 사실 영화는 3월 말에 완성됐고, 칸 수상 전이나 후나 달라진 것이 없어요. 사람들이 수상 사실을 의식하지 않고 영화를 봐주시길 바라지만 쉽지 않은 상황이 됐네요.”
이미 천만 영화를 만들었고, 칸 황금종려상까지 거머쥔 봉준호 감독이지만 ‘손익분기점’은 피해갈 수 없는 문제다. “순제작비만 130억이 들었어요. 베리히만이나 구로자와 같은 거장들도 평생 제작비 회수를 걱정했어요. 누군가에게 손해 끼치지 않고 현역 감독으로 계속 영화를 만들 수 있는 바탕을 만드는 것은 모두의 ‘기본 목표’죠. 지금까지 예술성과 상업성을 나눠 저울질한 적이 없고 충동적으로 이끌리는 대로 영화를 만들었지만, 운이 좋았어요. 송강호처럼 호소력과 설득력이 있는 배우들이 내가 말하고자 하는 스토리와 관객 사이에 오작교를 잘 놔 준 덕이겠죠.”
봉 감독의 다음 행보는 ‘부담’이자 또 다른 ‘도전’일 터다. “다음 영화도 <기생충> 정도의 규모예요. 서울 한복판에서 벌어지는 공포스러운 사건을 다루는 영화인데, 액션도 좀 있고….” 장르 사이를 절묘하게 타고 넘는 봉 감독의 장기는 다음 영화에서도 발휘된다. 칸 황금종려의 ‘무게감’이 앞으로의 그에겐 ‘자신감’의 또 다른 이름이 될 듯 싶다.
유선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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