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띵똥~ 저기, 전에 일하던 사람인데, 문 좀 열어주시면 안 될까요? 제가 중요한 걸 놓고 와서요.”
영화 <기생충> 속으로 들어가 보자. 온가족이 박 사장(이선균) 집에 기생하는 데 성공했다고 믿은 기택(송강호)네가 박 사장 집을 차지하고 앉아 자축 파티를 벌이던 그 날. 집안에 울린 벨 소리 한 번으로 영화는 갑자기 코미디에서 스릴러로 장르가 급변한다. 비에 젖은 머리, 김이 서린 안경 너머로 알듯 모를 듯 애매한 웃음을 짓던 그 인물 ‘문광’은 “참으로 시의적절한 등장”으로 스크린에 긴장감을 불어넣었다.
<기생충>에서 결코 길지 않은 분량이지만, 그 어떤 캐릭터보다 압도적인 존재감을 뽐낸 ‘문광’ 역을 맡아 열연한 배우는 바로 명품조연 이정은(49). 봉준호 감독은 처음 시나리오를 쓸 때부터 ‘문광’ 역에 이정은을 염두에 두고 캐릭터를 구체화해 나갔다고 한다. 영화가 700만 관객을 돌파한 지난 11일 종로구 삼청동에서 마주한 이정은은 “스스로 귀염상이라고 생각해 공포스러운 느낌을 줄 수 있을까 걱정을 했다”며 “최대한의 예의 바름과 선량함, 그 안에 담긴 알 수 없는 ‘의도’가 되레 더 큰 공포를 안긴 것이 아닌가 싶다”고 했다.
영화 <기생충>에서 문광 역할을 맡은 배우 이정은. 씨제이엔터테인먼트 제공
이정은과 봉 감독의 인연은 <마더>로 거슬러 올라간다. <마더>에 단역으로 출연하며 봉 감독과 만난 이정은은 그 뒤 <옥자>에서 슈퍼돼지 ‘옥자’의 목소리 역할을 맡은 바 있다. “봉 감독님이 문자 메시지로 옥자 사진과 제 사진을 붙여서 ‘닮지 않았느냐’고 농을 던지며 ‘이제 곧 이(옥자) 소리를 하게 될 겁니다’라고 했어요. 하하하. 늘 그런 식이에요. 이번에도 <기생충> 시나리오 작업을 하던 중에 메일로 간단한 콘티와 함께 ‘문광이라는 역할인데, 대본은 완성되면 보내겠다. 이상하고 재밌는 작품이 될 것이다’라고 했어요.”
그 콘티는 봉 감독 머릿속 문광의 이미지였다. 기괴한 포즈로 지하실로 통하는 문에 달라붙어 끙끙대고 있는. “그 콘티를 받고 ‘이게 무슨 자세죠? 평소에 기계체조 연습을 해야 하나요?’라고 물었어요. 하하하. 실제 촬영 땐 와이어를 매달아 찍었어요. 이 분이 나를 이리저리 쓰다 못해 죽이려나 보다 했다니까요. 으흐흐. 혹시 영화 자세히 보신 분 아시겠지만, 문을 열려고 끙끙대는 사이에 ‘뽀옹’하고 방귀 소리도 나요.”
영화 속 문광을 떠올리면 빼놓을 수 없는 장면이 바로 ‘종북 개그’다. 진짜 조선중앙티브이에 나오는 리춘희인가 싶을 정도로 완벽하단 칭찬이 자자하다. “감독님과 ‘북한군의 침입을 대비한 지하 벙커 같은 곳에서 시간을 많이 보내는 부부가 나름의 유희를 만든다면 바로 이런 것 아닐까’ 상의했어요. 사실 유튜브에서 리춘희 등의 모습을 보고 연습을 많이 했죠. 남북 관계란 게 워낙 가변적이라 여러 버전을 준비했어요. 그런데, 그 장면 생각해 보면 좀 슬프지 않아요?”
“내 얼굴 귀염상이라 ‘문광’ 역할 걱정
유튜브에서 리춘희 말투 맹연습
기생충은 이기적이지 않은 명작
인기? 그건 딱 석달짜리 거품!”
‘종북 개그’의 완벽한 북한 말투가 화제지만, 사실 이정은은 전작인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의 함안댁 역할에서도 볼 수 있듯 사투리에 남다른 재능을 보여줬다. “저 서울 왕십리 토박이예요. 하하하. 서울 사람이다 보니 사투리 연기는 연습을 많이 해요. <택시운전사> 때는 광주에 직접 가서 녹음해 와서 연습하고 그랬어요. 지금도 핸드폰에 보면 각 지방 사투리가 녹음돼 있죠. 그런데 본향이 그쪽인 사람들이 ‘잘했어’라고 해도 제겐 ‘애는 썼는데, 좀 더 해야겠어’로 자동변환 돼서 들리더라니까요. 하하하.”
드라마 <오 나의 귀신님>의 ‘서빙고 보살’부터 <미스터 션샤인>의 ‘함안댁’, 그에게 백상예술대상 여우조연상을 안긴 <눈이 부시게>의 ‘혜자(한지민) 엄마’ 역할까지…. 돌이켜보면, 그는 어느 시대의 어느 인물을 연기하든 늘 존재감을 뽐냈다. 마치 ‘감독’의 입장에서 캐릭터를 고민하는 듯 안성맞춤 연기를 펼쳐 보인달까? “이야기 속에서 인물의 배치에 대해 파악하는 감이 빠른 편이라는 게 제 장점인 듯해요. 캐릭터보단 이야기에 집중해서 이 인물이 궁극적으로 어떻게 행동해야 이야기가 살아날까에 대해 생각하는 편이죠.” 한양대에서 연극영화를 전공했지만, 더불어 상당 기간 연출부로 활동한 경험이 도움이 되는 듯하단다.
이런 그의 태도는 연기에 대한 철학에까지 영향을 줬다. 어떤 역할이든 신나고 재밌게 일하는 것이 목표이자 꿈이란다. “주·조연을 나누는 것은 사람들이죠. 전 이야기 안에서 즐겁고 신나게 일하고 싶어요. 주연은 나름의 무거운 짐을 지잖아요? 남은 제 인생에 그 무거운 짐을 지고 싶진 않아요. 다만, 이기적이지 않고 공생할 수 있는 작품을 좋아해요. 그런 면에서 <기생충>은 놀라운 작품이죠.”
영화 <기생충>에서 문광 역할을 맡은 배우 이정은. 씨제이엔터테인먼트 제공
이렇게 확~뜨기도 힘든데, 속으론 그래도 주연 욕심이 나지 않을까? “인기요? 그거 다 거품이에요. 딱 3개월짜리죠. 이미 <미스터 션샤인> 때 경험했어요. 하하하. 자라면서 엄마가 자꾸 기를 죽여 그런가? ‘네 외모에 무슨 영화배우냐’ 뭐 이런? 그래서 처음부터 그런 마음을 안 먹은 것 같기도 하고요. 하지만, 비인기 종목(조연)을 누구나 하고 싶은 인기종목으로 만드는 데 조금은 이바지 한 듯도 하네요. 그것도 오래 해서 그렇죠 뭐. 체육도 비인기 종목이 빛을 발하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리는 것처럼.”
이렇게 연기하느라 바쁜데 연애나 결혼은 언제 하냐고 짓궂은 질문을 던졌다. “저 사실 연애도 많이 했고요~ 다만 (결혼) 운이 없어서 그래요. 운이 없는 이유가 연기에 몰두하라는 뜻인 건가? 으흐흐.”
유선희 기자
duck@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