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광고

광고닫기

광고

본문

광고

문화 영화·애니

‘조롱에 둔 새’ 거부하는 신여성, 그 욕망을 단죄하는 서사의 한계

등록 2019-10-10 09:28수정 2019-10-10 11:23

[한겨레-CJ문화재단 공동기획]
43) 미몽
감독 양주남(1936년)
애순(문예봉)은 결혼 생활에 답답해하며 매일같이 외출해 백화점에서 쇼핑을 하거나 애인을 만난다.
애순(문예봉)은 결혼 생활에 답답해하며 매일같이 외출해 백화점에서 쇼핑을 하거나 애인을 만난다.
선룡: 대체 당신은 매일 어디를 나가는 거요?

애순: 그럼 날 방안에다 꼭 가둬두시구료. 난 조롱에 둔 새는 아니니까요.

―<미몽>(양주남, 1936)

<미몽>의 첫 장면은 ‘조롱에 둔 새’를 보여준다. 하지만 애순(문예봉)은 헨리크 입센의 <인형의 집> 로라처럼, 새장에 갇힌 새가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하고 있다. 이제 막 근대가 도래한 1930년대의 도시 경성, 신여성 애순은 답답한 선룡(이금룡)과의 결혼 생활보다는 자신의 자유로운 욕망을 펼쳐 보인다. ‘데파트’에서 보드라운 감촉의 최고급 옷을 사 입고 젊은 청년 창건(김인규)과 호텔에서 밀월을 즐긴다. 또 당대 최고의 무용가(조택원)의 공연을 보고 무작정 그를 탐한다. 이처럼 욕망을 따라 움직이는 그녀의 행보는 담대하다. 특히 용산역에서 막 출발하려는 조택원이 탄 기차와 이를 따라잡기 위해 교통규칙을 위반해 달리는 애순의 택시를 빠르게 보여주는 교차편집 장면은, 위반하고 탈주하는 근대 여성의 섹슈얼리티를 잘 드러낸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자신의 욕망을 전면화한 애순의 행위는 ‘유한마담의 치정’이라는 신문기사로 일갈되고, 영화는 현모양처를 훌훌 벗어던진 여염집 여성은 그 죄과를 스스로 책임지는 것이 옳다고 서둘러 마무리한다.

2006년에 발굴 공개된 발성영화 <미몽>은 근현대문화재로 등재된, 무성영화 <청춘의 십자로>(안종화·1934)가 발견되기 전까지 한국영상자료원이 소장하고 있던 가장 오래된 한국영화였다. 이 영화는 욕망을 전면에 내세우는 신여성을 배우 문예봉이 연기한다는 것과 1930년대 조선영화의 기술과 문법을 가늠할 수 있다는 점에서 영화사적 의의가 있다. 더불어 급격하게 변하는 근대 도시 공간 경성의 백화점, 호텔, 카페는 물론 거리도 엿볼 수 있는 작품이다.

<미몽>은 가부장적 질서를 배반한 애순을 단죄하면서, 그 뒤 한국영화에서 여성 섹슈얼리티를 다루는 서사의 원형을 제시한다. 1990년대까지 한국영화에선 섹슈얼리티의 주체로 여성 캐릭터가 종종 등장하지만 곧 이를 처벌하는 작업을 반복해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심혜경/영화연구자·중앙대 전임연구원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
언론 자유를 위해,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한겨레 저널리즘을 후원해주세요

광고

광고

광고

문화 많이 보는 기사

‘의인 김재규’ 옆에 섰던 인권변호사의 회고록 1.

‘의인 김재규’ 옆에 섰던 인권변호사의 회고록

‘너의 유토피아’ 정보라 작가의 ‘투쟁’을 질투하다 2.

‘너의 유토피아’ 정보라 작가의 ‘투쟁’을 질투하다

‘여자 둘이 살고 있습니다’, 억대 선인세 영·미에 수출…“이례적” 3.

‘여자 둘이 살고 있습니다’, 억대 선인세 영·미에 수출…“이례적”

노래로 확장한 ‘원영적 사고’…아이브의 거침없는 1위 질주 4.

노래로 확장한 ‘원영적 사고’…아이브의 거침없는 1위 질주

9년 만에 연극 무대 선 김강우 “2시간 하프마라톤 뛰는 느낌” 5.

9년 만에 연극 무대 선 김강우 “2시간 하프마라톤 뛰는 느낌”

한겨레와 친구하기

1/ 2/ 3


서비스 전체보기

전체
정치
사회
전국
경제
국제
문화
스포츠
미래과학
애니멀피플
기후변화&
휴심정
오피니언
만화 | ESC | 한겨레S | 연재 | 이슈 | 함께하는교육 | HERI 이슈 | 서울&
포토
한겨레TV
뉴스서비스
매거진

맨위로
뉴스레터, 올해 가장 잘한 일 구독신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