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 감독이 연출했거나 여성 작가가 각본을 썼거나 여성 캐릭터가 주요 역할을 맡았거나 하는 세 조건 중 하나만 충족해도 부여하는 에프등급. 에프등급은 영국 배스영화제에서 2014년 처음 개발했다.
<82년생 김지영> <돈> <가장 보통의 연애> <말모이> <생일>의 공통점은? 지난해 한국 영화 흥행 30위 안에 든 여성 감독의 첫 장편 연출작이라는 점이다. 김도영·박누리·김한결·엄유나·이종언 감독이 그들이다. 흥행작만이 아니다. 지난해 독립영화에서도 국내외 영화제 47관왕에 오른 김보라 감독의 <벌새>를 비롯해 이옥섭 감독의 <메기>, 한가람 감독의 <아워 바디>, 안주영 감독의 <보희와 녹양>, 유은정 감독의 <밤의 문이 열린다> 등이 호평받으며 신인 여성 감독의 활약상을 증명했다.
여성 영화들이 약진하고 있다. 최근 1~2년 새 여성 감독이 연출했거나 여성이 주요 인물로 나온 영화가 양적으로 늘었을 뿐 아니라 내용·장르 면에서도 한층 더 깊고 다양해졌다. 여성 영화에 대한 관심과 수요가 늘면서 아예 이를 전면에 내건 플랫폼까지 생겨났다.
지난해 말 정식 서비스를 시작한 ‘퍼플레이’(purplay.co.kr)는 국내 유일의 여성 영화 전문 스트리밍 플랫폼이다. 한국퀴어영화제 사무국장 일을 하며 서울국제여성영화제에 관객으로 참여하던 조일지씨는 “영화제가 아니면 보기 힘든 ‘여성 영화’들을 어떻게 하면 사람들이 손쉽게 접할 수 있을까”를 고민하다 2017년 말 퍼플레이를 만들고 베타(시범) 서비스를 시작했다. 2년의 시행착오를 거쳐 지난해 말 정식으로 문을 열었다.
국내 유일의 여성 영화 전문 스트리밍 플랫폼 ‘퍼플레이’의 메인 페이지. 화면 갈무리
퍼플레이는 미개봉작 여성 영화 170여편을 서비스하고 있는데, 80% 이상이 한국 단편영화다. 임순례 감독의 단편 <우중산책>(1994), 이경미 감독의 단편 <잘돼가? 무엇이든>(2004), 김보라 감독의 단편 <빨간 구두 아가씨>(2003) 등 이제는 유명해진 감독의 초기 단편들도 볼 수 있다. 이용자가 편당 500~4000원을 결제하면, 70%가 창작자·배급사 쪽에 돌아간다. 현재 가입자는 7천여명으로, 가입자 대비 결제율이 40%에 이를 정도로 충성도가 높다. 퍼플레이는 요즘 가입자 유치를 위해 ‘5만 퍼플레이어 양성 프로젝트’를 소셜미디어를 통해 진행하고 있다.
케이블 ‘씨네프’ 10년째 전문채널
여성 참여도 따라 ‘트리플 F’까지 부여
국내 유일 여성영화 전문 플랫폼인
‘퍼플레이’도 생겨 7천명 가입
“독립영화의 충분한 여성자원
상업영화 진출해 사회인식 밖고
영화계로 피드백되는 선순환 기대”
전통 매체인 텔레비전에도 여성 영화를 특정해 만날 수 있는 통로가 있다. 태광그룹 티캐스트가 운영하는 위성·케이블채널 <씨네프>는 10년 전 개국 때부터 ‘그녀의 영화 채널’이란 슬로건을 내걸고 여성 영화 채널을 추구해왔다. 지난해 방송한 영화 3편 중 1편이 여성 영화다. 다른 영화 채널의 2~3배 수준이다. <씨네프>는 2018년부터 ‘에프(F)등급’을 도입했다. 여성 감독이 연출했거나 여성 작가가 각본을 썼거나 여성 캐릭터가 주요 역할을 맡았거나 하는 세 조건 중 하나만 충족해도 에프등급을 부여한다. 에프등급은 영국 배스영화제에서 2014년 처음 개발했다. ‘이름을 가진 두 명 이상의 여성이 등장하는가?’ ‘그 두 명이 서로 대화를 나누는가?’ ‘그 대화의 주제가 남자 이외의 것인가?’ 하는 질문을 모두 통과해야 성 평등 영화임을 인정하는 ‘벡델 테스트’에서 착안해 여성 영화의 새 지표를 만든 것이다. 미국 최대 영화 리뷰 사이트 아이엠디비(IMDb)도 2017년부터 에프등급을 채택했다.
10년 전 개국 때부터 ‘그녀의 영화 채널’이란 슬로건을 내걸고 여성 영화 채널을 추구해온 위성·케이블채널 <씨네프>.
여성 감독·작가·주연배우의 세 조건을 모두 충족할 경우 ‘트리플 에프등급’을 매긴다. <씨네프>는 이런 영화들만 모은 ‘트리플 에프등급 특집’도 종종 진행하는데, 한국 영화로는 <메기> <밤의 문이 열린다> <영주> <밤치기> <눈길> 등이 방송됐다. 전찬욱 티캐스트 팀장은 “기존에는 트리플 에프등급에 해당하는 한국 영화를 찾기가 쉽지 않았는데, 지난해부터 부쩍 늘기 시작했다. <82년생 김지영> <벌새> <우리집>이 대표적”이라고 말했다. <씨네프> 채널 담당자인 진단비 대리는 “최근 여성 30~49살 시청률이 꾸준히 늘고 있다. 트위터에서도 에프등급에 대한 언급이 부쩍 늘었다”고 전했다.
영화진흥위원회의 지난해 한국 영화산업 결산을 봐도 이런 흐름은 뚜렷하다. 지난해 개봉작 중 여성 감독 비율은 14.1%로, 2017년(12.8%), 2018년(13.8%)에 이어 꾸준한 상승세를 보이고 있다. 순제작비 30억원 이상 영화로 한정하면 상승세는 더 가파르다. 2017년 0%, 2018년 2.5%에서 지난해 10.2%로 껑충 뛰었다. 규모 있는 상업영화에서 여성 감독이 크게 늘었다는 뜻이다. 영진위는 “일제 강점기를 다룬 드라마 <말모이>, 주가 조작을 다룬 범죄물 <돈>, 여성의 사회적 불평등을 다룬 <82년생 김지영>, 로맨틱 코미디 <가장 보통의 연애>, 세월호 유가족의 트라우마와 치유 과정을 그린 <생일> 등 다채로운 장르의 여성 감독 흥행작이 나왔다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고 밝혔다.
지난 2월 개봉한 <정직한 후보>는 40대 여성 정치인인 라미란을 원톱 주인공으로 내세웠다. 뉴(NEW) 제공
여성 영화의 약진은 할리우드에서 더 활발하다. 여성의 활약이 두드러진 <매드맥스: 분노의 도로>(2015)가 주목받은 뒤 <스타워즈: 깨어난 포스>(2015) <고스트버스터즈>(2016) 등 기존 남성 주인공을 여성으로 바꾼 영화가 잇따랐다. 히어로물에서도 변화가 시작돼 여성 감독이 연출한 <원더우먼>(2017)과 마블의 첫 여성 히어로 솔로 영화 <캡틴 마블>(2019)이 호평과 흥행 두 마리 토끼를 잡았다. 2018년 할리우드에 만연한 성폭력을 고발하는 ‘미투 운동’이 촉발되면서 이런 흐름은 더욱 거세졌다. 이런 분위기가 한국 영화에도 자연스럽게 전파되는 모양새다.
올해 들어 한국 여성 영화의 폭이 더욱 넓어지고 있다. 지난 2월 개봉한 <정직한 후보>는 40대 여성 정치인(라미란)을 원톱 주인공으로 내세웠고, 3월 개봉한 <찬실이는 복도 많지>도 40대 여성(강말금)의 평범한 일상과 고민을 담아 여성 관객들의 공감을 샀다. 오는 27일 개봉하는 <결백>은 여성 주인공(신혜선)이 법정 싸움을 하는 무죄 입증 추적극이다. 올해 개봉이나 촬영을 예정한 김혜수 주연의 <내가 죽던 날>과 이정현 주연의 <리미트>는 40대 이상 여성 배우가 이끄는 영화로 눈길을 끈다. 임순례 감독의 <교섭>은 제작비 100억원대 영화로는 첫 여성 감독 연출작이라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조일지 퍼플레이 대표는 “독립영화의 충분한 여성 영화 자원이 상업영화로 더 많이 진출해야 한다”며 “여성 영화가 사회 인식을 변화시키고, 사회 인식이 다시 영화산업에 영향을 끼치는 선순환을 기대한다”고 말했다.
서정민 기자
westmi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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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여성영화 뭘 봐야 할까?
세상에는 좋은 여성 영화들이 많다. 뭐부터 보면 좋을지 고민하는 이들을 위해 여성 영화 채널·플랫폼 관계자들의 추천작을 소개한다.
■ 전찬욱 티캐스트 팀장
<벌새>가 최근 본 여성 영화 중 최고작이다. 중학생 소녀 시각에서 본 작은 서사를 내 얘기처럼 공감하게 하는 섬세한 연출에 놀랐다. 지금 극장에서 상영 중인 오스트레일리아 영화 <라라걸>도 추천한다. 여성 경마선수가 주인공인데, 여성 차별 문제를 다루면서도 보편적 인간 승리로 느껴지도록 연출해 중년 남성 관객도 감동하게 한다.
■ 진단비 <씨네프> 담당자
2018년 개봉한 샬리즈 세런 주연의 <툴리>를 추천한다. 할리우드 스타로서 아름답고 섹시한 기존 이미지를 깨고, 늘어진 뱃살에 늘어진 옷을 입고 아기를 키우는 주부로서 ‘망가진’ 모습이 인상적이다. 비현실적인 해피엔딩 대신 여기서 더 나아지지 않을 거란 엔딩도 마음에 든다. 삶은 그런 것이다.
영화 <K대_OO닮음_93년생.avi> 스틸컷.
■ 조일지 퍼플레이 대표
동시상영 극장 매표원으로 일하는 여성 이야기 <우중산책>(감독 임순례·1994), 트럭 운전사가 한 소녀를 만나 하루를 보내는 이야기 <빨간 구두 아가씨>(감독 김보라·2003), 디지털 성범죄 문제를 다룬 <K대_OO닮음_93년생.avi>(감독 정혜원·2019) 세 단편을 보면 시대별로 여성 감독이 여성 이야기를 어떻게 풀어가는지 변화상을 짚어볼 수 있다. 퍼플레이에서 볼 수 있다.
서정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