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침입자>의 손원평 감독. 에이스메이커무비웍스 제공
“눈물이 날 것 같은 날이네요.”
말은 이렇게 했지만 그는 웃고 있었다. “‘언젠가 이 시절을 모두 다 과거로 얘기할 수 있는 날이 꼭 왔으면 좋겠다’고 그때 생각했는데, 그게 오늘이네요”라는 말을 한 직후였다. 그 시절 그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4일 개봉한 영화 <침입자>의 손원평 감독을 최근 서울 종로구 삼청동의 한 카페에서 만났다.
코로나19 사태로 개봉을 몇차례 연기한 끝에 극적으로 관객을 만난 신인 감독 이전에, 그는 소설가로 더 유명했다. 첫 장편소설 <아몬드>는 2016년 창비청소년문학상을 수상했고, 이듬해 출간된 이후 40만부 넘게 팔렸다. 지난 4월엔 <아몬드> 일본어판이 일본 ‘2020 서점대상’ 번역소설 부문 수상작으로 선정됐다는 소식도 전해졌다. 베스트셀러 작가에다 장편 상업영화 감독 데뷔까지, 탄탄대로처럼 보이지만 돌아보면 굽이굽이 인고와 자책과 번뇌의 뒤안길이다.
초등학생 때부터 작가를 꿈꿨을 정도로 책 읽는 걸 좋아했다. 중고생 시절 어머니는 “시험공부 안 해도 책만 읽으면 오케이” 했단다. 비디오테이프를 빌려 영화도 많이 봤다. “그렇다고 시네필(영화광)은 아니었고요. 이야기를 창작하는 일을 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그때부터 한 것 같아요.”
영화 <침입자> 스틸컷. 에이스메이커무비웍스 제공
대학생이 되고선 소설을 써 신춘문예에 냈다. 독립영화협의회 워크숍에 가서 영화도 배웠다. 대학 4학년 때 ‘리포트’처럼 써본 글로 <씨네21> 영화평론상을 받기도 했다. 졸업 뒤 영화를 본격적으로 공부하려고 한국영화아카데미에 들어갔다. 졸업작품인 단편 <인간적으로 정이 안 가는 인간>(2005)으로 영화제 상까지 받았다. <정사> <스캔들>로 유명한 이재용 감독의 <다세포 소녀> 연출부에도 들어갔다.
“그땐 스스로에 대한 믿음이 있었어요. 뭘 해도 잘되던 때라 금세 잘 풀릴 줄 알았죠. 그런데 이후 뭘 해도 안 되는 10년이 왔어요. 소설도 시나리오도 영화도 다 안 풀리니 자신을 의심하게 되더라고요. ‘난 재능이 없었구나’ 하고요.”
스스로 증명하려는 몸부림으로 쓰고 또 썼다. 작업 시간이 1시간이라면 그중 40분은 ‘아무도 내 글을 원하지 않는데 내가 왜 쓰고 있지?’ 하는 생각을 물리치는 시간이었다. 글 쓰는 게 괴로웠지만, 남들은 인정 안 해도 결과물은 남는다는 생각으로 묵묵히 견뎠다. 2013년 아이를 낳은 직후 더 많이 썼다. “아이를 재우고 나면 동화며 에스에프소설이며 시나리오며 닥치는 대로 썼죠.”
손원평 작가의 첫 장편소설 <아몬드> 표지. 창비 제공
침대에서 꼬물거리는 아이를 보면 괜히 눈물이 났다. ‘이 아이를 잃어버렸다 다시 찾는다면 알아볼 수 있을까? 기대와 전혀 다른 모습으로 커도 변함없이 사랑할 수 있을까?’ 이런 의문에서 출발한 게 <아몬드>다. 소설 속 곤이는 어린 시절 실종됐다가 괴물 같은 존재로 부모 앞에 나타난다. <침입자> 시나리오를 구상한 것도 같은 시기다. 영화는 어린 시절 실종됐다가 25년 만에 집으로 돌아온 동생 유진(송지효)과 동생을 의심하는 오빠 서진(김무열)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같은 지점에서 출발했지만 다른 장르, 다른 방식이었으면 좋겠다”는 그의 바람대로 소설과 영화는 전혀 다른 느낌을 준다. <아몬드>가 상처 입은 아이들의 내면을 파고든 성장소설이었다면, <침입자>는 관객이 끝까지 긴장과 의심의 끈을 놓지 못하게 만드는 미스터리 스릴러물이다. 소설이 먼저 빛을 본 것과 달리 오랜 세월 “포기와 희망고문 사이”를 오가던 영화가 마침내 세상에 나왔는데도 그는 덤덤하다. “<아몬드>가 상을 받았다는 소식을 듣고 3박4일간 울었어요. 그때 감정을 다 썼는지 이후론 뭐든 무덤덤하더라고요.”
영화 <침입자>를 연출하고 있는 손원평 감독. 에이스메이커무비웍스 제공
소설과 영화의 비슷한 점과 다른 점은 뭘까? “서사 구조로 풀어나간다는 것, 글로 쓰는 단계가 있다는 것이 공통점이고요. 글이 최종 매체냐 아니냐가 가장 큰 차이점이겠죠. 소설에선 인물의 생각과 감정을 직접 글로 쓰면 되지만, 영화에선 대사나 행동으로 표현해야 하거든요. 그래서 협업이 중요해요. <침입자>에서 좋은 배우·스태프와 일하며 재미도 있었고 의지도 많이 됐어요.”
그는 앞으로도 소설과 영화를 오가고 싶다고 했다. 그에게 두 가지는 서로를 보완해주는 작업이다. 여름엔 연애소설 한 편을 출간하고, 다음 영화도 경건한 마음으로 기다리겠단다. “제게 창작은 즐거우면서도 고통스러워요. 그래도 해야만 하는 직업 같은 거랄까요.” 재미와 고통, 예술과 직업 사이 어딘가에서 그는 묵묵히 쓰고 또 만든다.
서정민 기자
westmin@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