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 아카이브 프로젝트] 시간의 극장
제7화 봉준호 vs 박찬욱
제7화 봉준호 vs 박찬욱
영화 천재 이야기 듣던 봉
둘 다 첫 영화 흥행은 우울 서로 닮으면서 달라 흥미로운 둘
박이 ‘살인의 추억’을,
봉이 ‘복수는…’을 감독했다면
앳된 봉준호. 촬영은 김진수 기자. “명민하고 신중해 보인다.” <씨네21> 2000년 3월3일치에 실린 봉준호의 인상이다.
젊은 박찬욱. 지면에 게재되지 않았던 사진을 찾아내 이번에 처음 공개한다. 2000년에 이혜정 기자가 찍었다.
쥐꿈, 골드보이 이 일화가 사실일까? 봉준호에 따르면 절반만 그렇다. 박찬욱이 <날 보러 와요>의 판권을 원한 일은 사실이다. 그런데 봉준호가 탐낸 이야기는 <올드보이>가 아니라 다른 작품이었다. “<복수는 나의 것>처럼 유괴를 소재로 시놉시스를 쓴 게 있었지.” 봉준호의 푸념을 듣고 박찬욱은 받아친다. “내가 (<살인의 추억>을) 감독했다면 참 다른 영화가 나왔을 거야. 일단 제목부터 다르겠지. 나 같으면 그 마을 허수아비에 새겨진 글귀 있잖아. ‘너는 자수하지 않으면 사지가 썩어 죽는다.’ 그걸 쓰지 않았을까.” 봉준호가 <복수는 나의 것>을, 박찬욱이 <살인의 추억>을 감독할 수도 있었다. 어떤 영화가 나왔을까. 상상만 해도 흥미롭다. 두 감독이 닮았기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봉준호판 <올드보이>와 박찬욱판 <살인의 추억>을 상상해보는 것도 팬으로서 즐거운 일이다. <한겨레> 2003년 4월26일치에 봉준호와 박찬욱의 대담이 실렸다. 임종진 기자가 찍은 사진.
재앙이란 한 편의 부조리극 영화 <괴물>을 찍고는 이런 말을 했다. “재난이라는 게 무섭고 비극적이고 하지만, 반대로 희극적인 상황도 수반된다. 삼풍백화점이 무너졌을 때 나 역시 충격을 받고 슬펐는데, 그때를 하루하루 돌이켜보면 무너진 백화점으로 들어가 사람들이 골프채를 가져 나오거나 수입 매장을 뒤진다든가, 시내 도둑들이 다 모인다든가 하는 우스꽝스러운 상황이 있었다. 극한의 재앙이 닥쳤을 때 희비극은 항상 같이 나타나는 것 같다. … 한국에서 재앙이란 그런 느낌 같다. 부조리극 같지 않나.” 2005년 3월15일치 <씨네21>에 실린 인터뷰다. 한편 박찬욱은 2005년 8월2일치 <씨네21>에서 <친절한 금자씨>에 대해 “우습다며 계속 보다가도 웃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 식으로 주저하게 되고, 또 나중에는 웃은 게 조금 미안하게도 되는 그런 상태”를 노렸다고 했다. 김지운 감독을 만나서는 <복수는 나의 것>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씨네21> 2002년 4월9일치 기사다. “사실 (비극적인 상황도) 감정이입을 하지 않고 한발짝 떨어져서 보면 웃기는 순간이 많다. 배우가 막 우는 클로즈업을 초벌필름으로 소리 없이 보면 웃는 것처럼 보일 때가 있듯이.” 소름 끼치는 통찰이다. 한국 사회에 대한 날카로운 관찰력에서 두 사람의 유머가 나오는지도 모르겠다. 2000년 3월7일 <씨네21>에서 봉준호는 밝혔다. 유머 소재를 “주로 생활에서 얻고 늘 기록을 해둔다. 전철이나 술자리에서 옆사람이 하는 말을 자주 듣는 편이다.”
〈씨네21〉 2003년11월25일치에는 〈올드보이〉 촬영현장의 사진이 실렸다. 사진 설명이 눈길을 끈다. “개미에게 꽤나 많은 주문을 했던 박찬욱 감독은 단 한번에 OK 사인을 해주었다.” 독특한 유머감각이라고 해두자.
“<심판>을 빼면 섭섭하지” 촉망받던 두 사람이 첫 작품에서 주춤했다. 마음이 철렁했으리라. 다른 사람이면 낙담해서 그만뒀을 수도 있다. 그러나 봉준호와 박찬욱은 영화로 풀어내고 싶은 이야기가 많았다. 박찬욱은 1999년에 단편영화 <심판>을 만든다. 이듬해 박찬욱은 류승완에게 이렇게 말한다. “(<심판>을 빼놓고 말하면) 섭섭하지. 내가 제일 좋아하는 작품이거든.” 박찬욱은 단편영화 <심판>을 찍으며 얻은 깨달음이 자신의 인생을 극적으로 바꾸었다고 말한다. “단편영화다 보니 연극계 고참 배우들을 (제대로 보수도 드리지 못하며) 모시고 찍었다. 감독의 뜻대로 지시하기보다는 의견을 듣고 설득하면서 촬영을 했다. 그런 과정에서 배우들과의 의사소통이 무엇인지, 그리고 배우들이 얼마나 존중받아야 하는 사람들인지도 알게 됐다.” 2005년 7월21일치 <한겨레>에 실린 인터뷰다.
단편영화 〈지리멸렬〉 때문에 봉준호는 일찍부터 유명했다. 1996년에는 〈한겨레21〉이, 1997년에는 〈씨네21〉이 〈지리멸렬〉을 소개했다. 그때는 봉준호가 장편영화 감독으로 데뷔하기 여러 해 전이었다.
단편영화 〈심판〉의 한장면. “영화 경력에서 가장 큰 전환점은 〈공동경비구역 제이에스에이〉 직전에 만들었던 단편 〈심판〉 때였다.” 박찬욱의 회고다.
류승완은 감독지망생 때 박찬욱의 글을 좋아했다고 한다. 그때 박찬욱은 영화평론가로 유명했다. 지면에 실린 적 없는 2000년의 미공개 사진을 이번에 찾아내 소개한다. 이혜정 기자가 찍었다.
박찬욱이 관심 가진 인혁당 박찬욱은 변신을 시도한다. ‘복수 삼부작’은 <제이에스에이>와 느낌이 다르다. 2002년에 <복수는 나의 것>을 내놓으며 이렇게 말한다. “내 영화에 감독의 일관성이 없으면 좋겠다. 한 사람이 만든 영화 같지 않으면 좋겠다.” <씨네21> 2002년 4월9일치에 실린 인터뷰다. 2003년에는 <올드보이>를 만들며 말한다. “했던 거 또 하면 재미없다. 나는 싫증을 잘 내는 편이다.”(2003년 5월13일치) <친절한 금자씨>는 시나리오 작가부터 새로 뽑았다. “내가 직접 한명을 골랐다.”(2004년 6월8일치) 이후로 호흡을 맞추게 되는 정서경 작가다. 봉준호도 번번이 새로운 시도를 한다. 2006년에는 <괴물>을 내놓았다. 괴수영화도 가족영화도 아닌 시도였다. 영화를 만들기 시작할 무렵에 말했다. “<살인의 추억> 때도 딱히 장르는 없고 ‘농촌 스릴러’나 ‘<쎄븐>의 <전원일기> 버전’이라고 말했는데, 이번엔 ‘<에이리언>의 한강수 타령’쯤 되려나.”(2005년 3월15일치)
경기도 양수리에 꾸민 판문점 세트. 〈공동경비구역 제이에스에이〉 촬영을 위해 명필름이 만들었다. “실제상황이 아닙니다.” 사진 설명이 눈길을 끈다. “남북병사로 분장한 배우들이 더위를 식히기 위해 음료를 나눠마시는 장면이다.” 윤운식 기자가 찍고 〈한겨레〉2000년6월6일치에 실렸다.
박찬욱은 <공동경비구역 제이에스에이>로 성공을 거둔 뒤 <복수는 나의 것>으로 변신을 시도한다. 김진수 기자가 찍고 2001년 7월27일치 <한겨레>에 실렸다. 송강호도 박찬욱도 젊었다.
2002년 10월1일치 <씨네21>에는 <살인의 추억> 제작발표회 사진이 실렸다. 사진 속 인물은 봉준호, 송강호, 김상경, 그리고 제작사 대표 차승재다. <한겨레> 2003년 4월26일치에는 봉준호와 박찬욱의 대담 기사가 실렸다. 제목은 “한사람이 미치니까 한국영화 좋아지네”. 제목의 “한사람”이란 바로 제작자 차승재를 가리키는 말이었다.
2003년4월22일치 〈씨네21〉에 실린 〈살인의 추억〉 촬영 현장. 봉준호의 뒷모습이라고 한다.
2003년4월22일치 〈씨네21〉에 실린 〈살인의 추억〉 촬영 현장. 발가락 양말과 철지난 옷가지들이 ‘봉테일’이라 불리는 봉준호의 치밀함을 보여준다. 변희봉, 김상경, 송강호와 같은 배우들의 정겨운 모습과 뒤에 서서 지켜보는 감독의 환한 얼굴이 눈길을 끈다.
〈올드보이〉를 만들던 2003년에 유지태, 박찬욱, 최민식이 함께 찍은 사진. 촬영은 정진환 기자. 게재되지 않았던 사진을 공개한다.
칸 황금종려상과 아카데미상을 받고 청와대에 초청된 〈기생충〉의 감독과 배우들이 환하게 웃으며 셀카를 찍는 모습이다. 오른쪽 뒤 훤칠한 사람이 봉준호다. 김정효 기자가 찍고 2020년2월20일치 〈한겨레〉에 실렸다.
봉준호가 언급한 ‘수능시험지’ 봉준호는 <살인의 추억>을 만들고 2003년에 만화책 <프롬 헬>을 언급한다. “잭 더 리퍼라고 1890년대 영국에 실존했던 연쇄살인범 있잖은가. 그 사건을 다룬 <프롬 헬>이라는 만화를 보게 됐는데 전화번호부처럼 두꺼운 그 책을 덮고 나서 가장 강렬하게 든 느낌은, 런던 사람들이 그때 이렇게 살았구나, 하는 거였다.” <왓치맨>과 <브이 포 벤데타>의 작가 앨런 무어가 그린 만화책이다. <프롬 헬> 역시 영화가 한번 나왔는데 평가가 썩 좋지는 않다. 봉준호가 언젠가 다시 만들면 어떨까 기대하는 사람이 나 말고도 전세계에 많이 있을 것 같다. 2000년 <플란다스의 개>를 만든 후에는 이런 말도 했다. “(앞으로 계획이) 몇개 있는데, 그중 하나는 고등학생 3명이 수능시험지를 훔치는 거다. 우발적인 게 아니라 2년간 치밀한 훈련과 연구, 시행착오를 거쳐서. 나는 그들의 노력을 인정하는 쪽으로 그리고 싶었다. 그런데 수능이 없어진대서 싱거워져버렸다. 어쨌든 남이 하지 않은 이야기를 남이 안 한 방식으로 만들고 싶다.” 꼭 이 작품이 아니더라도 좋다. 부디 좋은 작품 더 많이 만들어주시길. 다음 시대의 사람들은 봉준호와 박찬욱과 동시대를 살며 영화를 즐기던 우리를 부러워할 것이다.
2002년에 두 중학생이 미군 장갑차에 치어 숨졌다. 차를 운전하던 미국 군인이 무죄 판결을 받자 전국적으로 항의 시위가 일어났다. 2002년12월6일 감독 박찬욱과 류승완이 삭발을 한 모습을 김진수 기자가 찍었다. 최민식과 김미화의 모습도 보인다. 신문에는 게재되지 않은 사진을 이번에 공개한다.
한국사회의 여러 문제에 대하여 봉준호와 박찬욱은 주저하지 않고 소신을 밝히곤 했다. 2004년4월에 민주노동당 지지를 선언하기도 했다. 봉준호, 오지혜, 박찬욱, 그리고 노회찬의 모습이 보인다. 류우종 기자가 찍었다.
박찬욱의 단편영화 〈믿거나 말거나 찬드라의 경우〉. 네팔사람 찬드라가 겪은 실화를 영화로 만들었다. 네팔말을 쓰는 멀쩡한 네팔사람을, 한국말을 못하는 정신질환자로 오인해 잡아 가둔 실제 사건이었다. 2003년4월29일치 〈한겨레〉에 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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