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나이가 들면, 특히 여성이라는 이유로 사람이길 포기해야 할까요. 모든 문제를 직면하게 하고 생각하게 만드는 작품.”(홍○노)
“누군가를 차별하거나 매도하거나 함부로 판단하진 않았는지 돌아보게 하고, 반성하게 합니다.”(오○진)
“<69세>를 보고 주인공 효정씨처럼 단단하게 살아갈 수 있는 힘을 얻었습니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꼭 필요한 용기와도 같은 영화였습니다.”(이○희)
지난 20일 개봉한 영화 <69세>의 공식 서포터스 ‘봄볕단’ 회원들이 남긴 감상평이다. 영화 개봉 69일 전 모집한 봄볕단에 모여든 이들은 40명. 주축은 20~30대 여성이다. 제목부터 실버세대 이야기임을 드러내는 이 영화에 젊은 세대들이 공명하고 있다. 이뿐 아니다. 최근 6070 실버세대를 전면에 내세운 영화들이 극장가 스크린을 은빛으로 물들이면서 우리 사회에 새로운 화두를 던지고 있다.
■ 스크린 물들인 실버 영화들
<69세>는 69살 여성 효정(예수정)이 병원에서 29살 남성 간호조무사에게 성폭행을 당한 뒤 이에 맞서는 이야기를 다뤘다. 충격적인 사건 자체보다 효정이 마주하는 편견과 차별, 그리고 끝내 이를 넘어서는 과정에 초점을 뒀다. 영화 속엔 우리 사회에 만연한 여성 노인에 대한 편견과 무지가 고스란히 드러난다. 효정은 고민 끝에 경찰에 신고하지만, 경찰과 주변 사람들은 말도 안 되는 일이라며 효정을 치매 환자로 몰아간다. 법원 또한 나이 차이를 근거로 사건의 개연성이 부족하다며 구속 영장을 기각한다. 연출을 맡은 임선애 감독은 2013년 우연히 여성 노인을 대상으로 한 범죄 관련 칼럼을 읽고, 2016년부터 시나리오를 쓰기 시작했다. 그는 “우리 사회가 여성 노인을 ‘무성적 존재’로 보는 편견 때문에 가해자의 타깃이 된다는 대목을 읽고 충격을 받았다”며 “중년인 나도 곧 노년이 될 거라 생각하니 그냥 넘길 수 없었다. 이제는 소외된 사각지대의 이야기를 꺼낼 때가 됐다고 생각했다”고 영화를 만든 이유를 설명했다.
<늙은 부부 이야기: 스테이지 무비>. 예술의전당 제공
지난 19일 개봉한 <늙은 부부 이야기: 스테이지 무비>도 실버세대 영화다. 박동만(김명곤)과 이점순(차유경) 두 60대 남녀의 황혼 로맨스를 유쾌하면서도 애틋하게 담은 영화로, 2003년 초연한 연극 작품을 예술의전당이 스크린으로 옮겼다. 금기시되던 노인의 성과 사랑을 다룬 이 작품이 17년간 꾸준한 사랑을 받았다는 점도 시사하는 바가 크지만, 예술의전당이 공연예술과 영화예술을 접목한 첫 ‘뉴노멀’ 콘텐츠로 이 작품을 골랐다는 점이 중요하다. 예술의전당 관계자는 “고령화 시대를 맞아 중요한 화두로 떠오른 노인의 사랑을 다룬 작품이라 의미가 각별하다”고 설명했다. 배우 차유경은 “연세 드신 분들만 본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젊은 세대도 관람해 부모님 세대를 이해할 수 있는 기회가 됐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나타냈다.
새달 2일 개봉하는 <오! 문희>는 시골 노인 문희(나문희)가 손녀를 치고 달아난 뺑소니범을 잡기 위해 아들(이희준)과 고군분투하는 이야기를 담은 영화다. <수상한 그녀>(2014), <아이 캔 스피크>(2017), <감쪽같은 그녀>(2019) 등 상업영화에서 주체적인 노인 캐릭터를 선보여온 나문희는 이번에 액션 연기까지 소화하며 한 걸음 더 나아간다. 달리는 건 물론, 와이어에 매달려 나무에 올라가고, 트랙터를 직접 몰기도 한다. 영화를 연출한 정세교 감독은 “우리는 뛰는 게 별거 아니라고 여기지만, 79살인 선생님께는 강도 높은 액션”이라며 “트랙터 운전 장면도 컴퓨터그래픽으로 하면 된다고 했더니 선생님께서 ‘정 감독, 나도 면허 있어’라며 기어이 연습하시고는 직접 해내셨다”고 전했다. 영화 속 주체적 노인상을 현실에서도 보여준 셈이다.
■ 노인 집합체보다 개인을 조명
실버세대 이야기를 다룬 콘텐츠는 최근 몇년간 지속해서 이어져왔다. 고령화 시대를 맞아 6070세대에 대한 사회적 관심과 더불어 그들의 활동력 또한 커졌기 때문이다. 황진미 평론가는 “방송의 경우, 중·노년이 주요 소비자가 되면서 드라마 <디어 마이 프렌즈>(2016), <눈이 부시게>(2019), 예능 <박원숙의 같이 삽시다>(2020) 같은 노년을 다룬 콘텐츠가 늘었다”며 “이런 흐름은 더욱 가속화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영화 쪽도 마찬가지다. 노인의 성을 처음 제대로 다뤄 화제를 불러일으켰던 <죽어도 좋아!>(2002) 이후 <그대를 사랑합니다>(2011), <님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2014), <장수상회>(2015), <비밥바룰라>(2018) 등 노인을 다룬 다큐와 극영화가 점차 늘어났다. 지난해에는 <시인 할매>, <칠곡 가시나들> 등 제2의 인생을 사는 노인을 조명한 다큐도 잇따라 개봉했다.
올해 실버세대 영화의 특징은 다큐보다 극영화가 많다는 점이다. <69세>, <늙은 부부 이야기: 스테이지 무비>, <오! 문희> 모두 극영화다. 그러면서도 다큐 못지않게 현실에 기반을 둔 개별적이고도 구체적인 이야기를 다룬다. 영화적 재미는 물론 관객의 공감대 또한 놓치지 않는다. 특히 <69세>의 경우 집합적인 노인 세대 이야기로 뭉뚱그리지 않고 개인의 구체적 심리를 파고들었다는 점에서 이전의 노인 영화와는 또 다르다. 주연을 맡은 배우 예수정은 “청년들이 다양하게 생각하고 다양한 삶을 추구하는 것처럼 노인들도 마찬가지”라며 “노인을 소재로서의 집합체로 보지 않고 개개인을 조명하고 탐구하려는 시도가 좋아서 출연을 결정했다”고 말했다. <오! 문희> 또한 실제 농촌에서 자주 일어나는 뺑소니 사고와 농촌에 가장 많이 거주하는 노인 세대를 연결했다는 점에서 현실성이 높다. 윤성은 평론가는 “과거 <마파도>(2005) 같은 영화에서 욕을 많이 하는 어르신이 신기하고 재밌는 소재로 소비됐다면, 이제는 현실에 기반을 둔 노인 이야기가 많아졌다는 게 달라진 점”이라고 설명했다.
■ 폭넓어진 관객층…진실성·다양성 담아야
달라진 실버세대 영화들이 이전보다 폭넓은 관객층에 다가간다는 점도 눈여겨볼 만하다. 과거엔 노인 소재 영화가 영화관 주요 관객인 20~30대 젊은층의 외면을 받는다는 인식이 강했다. 하지만 최근의 실버세대 영화는 젊은 관객도 충분히 공감할 만한 이야기로 다가가고 있다. 실제로 씨지브이(CGV)의 <69세> 관객 분석을 보면, 21일 현재 20~30대가 58%를 차지하며 여성(66%)의 선호도가 특히 높다. 성폭력 문제는 나이가 많든 적든 여성이라면 누구도 자유로울 수 없는데다, 주인공 효정이 스스로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지켜내는 과정이 보편적인 감동과 용기를 주기 때문이다. 유튜브에서 박막례, 밀라논나 등 할머니 콘텐츠가 세대 장벽을 넘어 젊은 세대를 열광하게 만든 현상도 이런 달라진 분위기를 반영한다. 윤성은 평론가는 “노년의 삶을 먼 미래의 남 얘기가 아니라 곧 닥칠 내 얘기로 바라보는 중년 관객층까지 더해져 많은 이들이 실버세대 콘텐츠를 찾고 있다”고 분석했다.
<늙은 부부 이야기: 스테이지 무비>. 예술의전당 제공
전문가들은 실버세대 영화가 더 늘어날 것이라고 내다보면서도 중요한 것은 진실성과 다양성을 담는 것이라고 강조한다. 황진미 평론가는 “노인 영화가 잘될까 하는 의구심에 전형적인 걸 만들어야 안 망할 것이라는 강박을 버려야 한다. 소비층은 이미 충분한 만큼 다양성을 포기하지 않았으면 한다”고 말했다. 김형석 평론가도 “<69세>처럼 그동안 금기시되던 주제를 정면으로 다룬 영화가 더 나와야 한다”며 “많이 알려지진 않았지만 지난 7월 개봉한 <욕창>처럼 실버세대의 핵심적인 욕망을 현실적이고 세밀하게 다룬 영화가 더 많아졌으면 한다”는 바람을 나타냈다.
배우 예수정은 뼈가 담긴 말을 남겼다. “노인의 삶을 면밀하게 탐구하고 진실로 이해하지 못할 거라면, 그런 작품은 안 하는 게 좋다. 젊은이들이 보고 ‘저게 우리 미래라면 희망이 없다’고 여겨선 안 된다. 죽음에 가까워진 노인이라고 사유를 멈추는 것이 아니다. 단단하게 걷는 노년의 삶을 깊이 있게 다루는 작품이 절실하다.” 60대에도 끝없이 사유하며 존엄을 지키는 배우의 진심 어린 당부다.
서정민 기자
westmin@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