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9일 애니 ‘태일이’ 제작보고회에서 권해효(맨왼쪽·평화시장 한미사 사장)·염혜란(이소선 어머니)·장동윤(전태일 열사) 배우가 목소릴 연기를 맡은 캐릭터와 함께 인사를 하고 있다. 사진 명필름 제공
전태일이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외쳤던 1970년, 박순희(73)씨는 서울 영등포구의 한 섬유 공장에서 일하며 사장 몰래 노동조합을 조직하고 있었다. ‘노동자’라는 말이 불순분자가 쓰는 말이라며 ‘공장떼기’ 혹은 ‘공순이’로 불리던 시절이었다. 노조 결성 과정에서 “이가 덜덜 떨릴 정도의 두려움”을 느꼈던 박씨는 노동 현장을 떠나 평소 독실했던 가톨릭 교회의 수녀가 되기로 결심했다. 하지만 “전태일 동지는 목숨까지 바쳤는데 나는 그저 도망만 간다”는 생각이 수녀원 문 앞까지 향했던 박씨의 발길을 붙잡았다. 고민 끝에 그는 수녀 대신 노동운동가의 삶을 살아가기로 했다. 이후 전국노동운동단체협의회 공동대표, 민주노총 지도위원 등을 거치며 동료들과 함께 ‘전태일의 꿈’을 실현하기 위해 살아왔다. “그때 느꼈던 죄책감 때문에 일흔이 훌쩍 넘은 지금까지 현장을 떠나지 못하고 있어요.”
박씨는 16일 <한겨레>와 한 전화통화에서 울먹이며 말했다. “모든 국민이 ‘태일이 친구들’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영화 <태일이> 시민 제작위원에 참여하기로 했어요.” 그는 “지금까지도 50년 전과 같이 ‘근로기준법 준수’ 구호를 외쳐야 하는 현실이 개탄스럽다”고 덧붙였다.
지난 13일 전태일 50주기를 맞아 애니메이션 영화 <태일이>(감독 홍준표)의 제작사 ‘명필름’은 제작보고회를 열고 시민 제작위원 1970명을 모집한다고 밝혔다. 내년 영화가 개봉하면 위원들은 ‘태일이 친구들’로 엔딩 크레딧에 이름을 올리게 된다. 노동계·법조계·의료계 등 각계 인사 166명이 먼저 참여 의사를 밝혔다.
‘시민제작위원’ 모집중인 애니메이션 영화 ‘태일이’ 포스터. 사진 명필름 제작
이 작품은 앞서 2018년 11월 제작발표회 이후 2019년 초까지 카카오같이가치와 함께한 모금을 통해 1만 명이 넘는 국민들이 제작비를 후원했다.
‘비정규직노동자의집 꿀잠’(꿀잠)의 활동가 김경봉(61)씨도 ‘태일이 친구’를 자처하고 나섰다. 콜트콜텍 해고노동자로 2007년부터 4464일간 최장 거리투쟁을 이어갔던 김씨는 “전태일은 선생님”이라고 말했다. 그는 “투쟁하면서 저녁마다 짬을 내어 동료들과 전태일의 삶을 공부했다”며 “왜 우리가 투쟁하고 노동기본권을 외쳐야 하는지 배울 수 있었다”고 돌아봤다. 서울 신길동에 위치한 ‘꿀잠’은 투쟁하는 노동자들이 식사를 하고 몸을 누일 수 있는 곳이다. “꿀잠에 있다 보면 제2하청, 제3하청까지 사람들을 쪼개어 놓고 삶을 파괴하는 현실이 여전히 바뀌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절감하게 돼요.”
청년유니온 위원장으로 활동하고 있는 이채은(27)씨도 ‘태일이 친구’가 되기로 결심했다. 그는 “50년 전 전태일 열사가 하루 16시간 일하는 봉제공장 노동자들의 현실에 분노했는데, 지금도 ‘패션 어시들(패션스타일리스트 어시스턴트)’이 휴일 없이 일하며 월 평균 임금 100만원도 채 받지 못하는 현실이 반복되고 있다”고 말했다.
명필름은 새해 1월30일까지<태일이>의 제작위원을 모집한다. 참여 기금은 영화 수익 정산 뒤 제작위원들에게 배분되며 수익금 일부는 사회연대기금으로 쓰일 예정이다. 참여 방법은 명필름 누리집, 사회관계망서비스에서 찾아볼 수 있다.
박윤경 기자
ygpark@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