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가 돌아가셨다. 경만(하준)·경미(소주연) 남매는 마음 놓고 슬퍼할 겨를조차 없다. 빈소 제단 장식은 뭘로 할지, 입관식은 어느 수준으로 할지, 문상객 음식에 돼지고기 수육을 추가할지 말지… 돈 들 일 앞에서 경만은 주저한다. 아버지의 오랜 투병 생활로 돈은 바닥났다. 그 와중에 무명 엠시(MC) 경만에게 일이 들어온다. 일당 200만원이란 말에 경만은 동생에게 “집에 잠깐 다녀오겠다”고 하고 경남 삼천포(사천)로 향한다. 부친상을 뒤로하고 남의 잔칫집에서 웃어야 한다.
김록경 감독이 영화 <잔칫날>(상영 중)을 처음 구상한 건 고속도로 차 안에서 신바람 이박사의 ‘테크노 뽕짝’을 들었을 때다. ‘경만이 팔순 잔치 주인공 할머니를 웃겨야 하는 상황에서 갑자기 그 할머니가 쓰러져 병원에 실려 간다. 그런데도 경만은 꼭 돈을 받아야 하기에 잔칫집을 떠나지 못한다.’ 여기까지 구상하고 덮었다. 왜 꼭 돈을 받아야 했는지 이유가 떠오르지 않아서였다. 한참 뒤 자신을 스스로 되짚어봤다. 언제 돈이 절실했는지를. 2012년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였다. 형과 단둘이 남아 슬픔에 겨운 순간에도 돈 때문에 고민해야 했다. 초상집과 잔칫집의 연결고리는 그렇게 만들어졌다.
영화 <잔칫날>을 연출한 김록경 감독. 트리플픽쳐스 제공
삼천포에서 자란 그는 고등학생 시절 영화 <비트>의 정우성을 보고 배우를 꿈꿨다. 2002년 부산예대 연극과에 입학했지만, 한학기 만에 그만둬야 했다. 어려운 집안 형편 탓이었다. 이후 건설 현장, 공장 등에서 일하면서도 연기에 대한 꿈을 놓지 않았다. 영화 <돌려차기>(2004) 오디션에 지원했다가 덜컥 합격했다. 주인공 김동완의 패거리 중 하나를 연기했다. “그때 현장 느낌이 너무 좋아 꿈이 더 간절해졌어요.” 1일 만난 김 감독이 말했다. 이후 <파랑주의보> <사생결단> 등 상업영화와 독립영화에 꾸준히 출연했다. “연기하다 보니 나도 시나리오 쓰고 연출을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독립영화 감독님들한테 물어보며 어깨너머로 배웠죠.” 2016년 첫 단편 <연기의 힘>을 연출했다. 각본과 주연도 도맡았다. “즐거운 작업이었지만, 부족함도 느꼈어요.” 부족함을 채우고자 <성재씨> <꽃> <사택망처> 등 단편 작업을 이어갔다. 그리고 마침내 첫 장편 <잔칫날>을 내놓았다.
<잔칫날>에서 속으론 울면서도 겉으론 웃어야 하는 경만은 물론, 홀로 장례식장을 지키며 버거워하다 끝내 주저앉는 경미의 모습은 안쓰럽다 못해 처절하다. 절정의 장면에 이르면 눈물을 쏟지 않고는 견디기 힘들다. 촬영장 스태프도 울었다고 한다. “누구든 사랑하는 이를 떠나보낸 경험이 있기에 다들 비슷한 마음이었나 봐요.” 그래도 마지막 장면은 따스한 희망으로 반짝인다. 김 감독은 “돈보다 더 중요한 건 소중한 사람들이 주고받는 마음이라는 얘기를 전하고 싶었다”고 했다.
영화는 지난 7월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에서 작품상·배우상(하준)·관객상·배급지원상 등 4관왕에 올랐다. 장건재 심사위원은 “삶의 비애와 아이러니를 유쾌하면서도 성숙한 시선으로 담은 작품”이라고 평했다. 김 감독은 “작품상까진 생각도 못 했다. 당시 너무 정신이 없어서 수상 소감을 뭐라고 했는지도 기억나지 않는다”고 말했다.
김록경 감독이 배우로 출연한 영화 <여름날> 스틸컷. 씨네소파 제공
그는 지난 8월 개봉한 영화 <여름날>(감독 오정석)에서 첫 장편 주연을 맡기도 했다. 인물의 기본 설정과 상황만 놓고 대사와 행동을 100% 즉흥으로 연기한 작품이었다. “연기할 때는 감독님이 저에게 많이 맡기는 걸 선호하는데, 그게 극대화된 형태였어요. 연기하는 동시에 대사를 쓰고 연출도 한 셈이죠. 연출할 때는 원하는 방향을 배우와 충분히 소통하며 이끌어가려 해요. 이번에 하준·소주연 배우가 정말 잘해줬어요. 감독 모니터를 통해 그들의 연기를 보며 나도 함께 호흡했어요. 그들의 진짜 감정을 잡아낼 수 있었죠. 배우 경험이 연출에도 큰 도움이 된 것 같아요.”
그는 차기작으로 가정폭력에 시달린 두 사람이 만나 새로운 형태의 가족을 꾸리는 이야기를 준비 중이다. 연기를 그만둔 건 아니지만, 연출에 우선순위를 두고 있다. “하고 싶은 얘기가 많아요. 코로나19 사태 장기화로 쉽지 않지만, 더 많이 작업하고 싶어요.”
서정민 기자
westmin@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