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묘하다. 현실인지 환상인지, 현재인지 과거인지, 모든 경계가 흐릿하다. 그런데도 빠져들게 된다. 10일 개봉한 <겨울밤에>는 이야기보다 구조가 더 빛나는 영화다. 보고 나면 ‘한겨울밤의 꿈’을 꾼 것처럼 몽롱하고 아련한 여운이 남는다.
50대 부부인 은주(서영화)와 흥주(양흥주)는 30년 만에 춘천을 찾는다. 여행 중 휴대전화를 잃어버렸다는 걸 뒤늦게 안 은주는 흥주와 함께 지나온 길을 되짚는다. 소양강 유람선을 타고 청평사까지 되돌아가지만, 흔적을 찾지 못한다. 배가 끊겨 청평사 인근에서 숙박하게 된 부부는 식당에서 늦은 저녁 식사를 하다가 30년 전 이곳에 온 적이 있다는 사실을 떠올린다.
식당에는 젊은 남자(우지현)와 여자(이상희)도 있다. 인근 군부대에서 외박 나온 군인과 그를 면회 온 친구다. 연인 사이가 아니라는 둘도 마지막 배를 놓쳐 이곳에서 밤을 보내야 한다. 영화는 50대 부부와 젊은 남녀가 이곳에서 하룻밤을 보내며 겪는 일을 교차해 보여준다.
민박집에서 잠을 설치던 흥주는 혼자 조용히 나온다. 정처 없이 걷다가 누군가를 보고 홀린 듯 따라간다. 그 여자는 흥주의 옛사랑 해란(김선영)이다. 같이 술을 마시고 담배를 나눠 피우다 잠시 다른 데 신경이 팔린 사이, 해란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없다. 흥주는 정말로 다시 해란을 만났던 걸까?
젊은 여자는 남자에게 “애인과 헤어졌다”고 고백한다. 둘은 얼어붙은 폭포, 청평사 등을 다니다 애틋한 감정을 느끼고 입을 맞춘다. 젊은 남녀는 마치 50대 부부의 과거인 양 보이기도 한다. 은주는 새벽녘 문 닫은 청평사에 몰래 들어가 휴대전화를 찾아보지만 흔적도 없다. 돌아오는 길에 얼어붙은 폭포를 바라보던 은주는 얼음에 금이 가면서 위기에 처한다. 그때 근처에 있던 젊은 남녀가 도와준다. 그렇다면 젊은 남녀는 과거의 인물이 아닌 걸까?
영화는 무엇 하나 또렷하게 말해주지 않는다. 인물의 무의식을 따라 부유하는 것처럼 보인다. 같은 공간을 배회하며 장면이 반복되거나 변주되는 대목도 있다. 이런 구조적 실험은 홍상수 감독의 영화를 떠올리게도 한다. 연출과 각본을 맡은 장우진 감독은 “스토리가 아닌 정서와 체험, 감각 중심의 영화다. 인물의 동선과 카메라의 움직임, 프레이밍(화면의 구도와 구성)에 관해 많은 고민을 했다. 한국 독립영화 하면 자연스럽게 리얼리즘, 사실주의, 잿빛 현실을 떠올리게 되는데, 이런 선입견에서 벗어나 보고자 구조주의적인 접근 방식을 택했다”고 말했다.
장 감독은 2014년 장편 데뷔작 <새출발>로 제15회 전주국제영화제 한국경쟁 부문 대상을 받으며 주목받았다. <겨울밤에>는 전작 <춘천, 춘천>(2018)과 마찬가지로 장 감독의 고향 춘천을 배경으로 한다. 양흥주·우지현은 장 감독과 <새출발> <춘천, 춘천>에 이어 세번째로 만났다. <기생충>으로 유명해진 박명훈이 청평사 스님으로 특별 출연한다.
영화는 제40회 프랑스 낭트 3대륙 영화제 국제경쟁 부문 청년심사위원상을 받았다. 또 제22회 에스토니아 탈린 블랙나이츠 영화제에서 서영화가 여우주연상을, 장 감독이 감독상을 받았다.
서정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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