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재철 작가의 회고전 ‘사랑과 평화’가 열리고 있는 아르코미술관 1층 전시장. 2004~11년 실크로드 퍼포먼스 투어를 하면서 현지 주민에게 생활용 자재로 나눠준 국내 상업 펼침막으로 만든 설치작품과 관련 작업 아카이브 기록들이 한가운데 놓여 있다. 안쪽 벽면에는 당시 그의 1~3차 여정을 찍은 영상들이 흘러간다.
‘자본주의 쓰레기’와 함께 유랑한 예술과 삶이었다.
지난해 암으로 61살 나이에 타계한 정재철(1959~2020) 작가는 마지막 20년간 유라시아를 무대로 유랑의 삶을 살았다. 특이하게도 ‘자본주의 쓰레기’라고 부르는 것들을 대륙에서 전혀 다른 방식으로 흩뿌리고 바닷가에서는 주워 모으며 일한 것이 주된 작업이었다.
그는 2004~11년 유라시아 실크로드 도시를 도보와 차량으로 유랑하면서 온갖 상업광고로 뒤발한 한국의 폐펼침막을 주민들에게 생활용 자재로 나눠줬다. 주민들과 함께 재활용 천막과 햇빛가리개를 만들고, 그 과정을 찍고 기록했다. 자신이 펼침막으로 만든 옷을 입고 유럽 도시 광장을 활보하기도 했다. 그 뒤 한반도 동서남 해안과 제주도 등 섬에 밀려온 해양쓰레기 부유물들을 수집해 컬렉션을 만들었다. 이동 경로를 담은 아름다운 지도를 여럿 그려냈다.
2층 2전시실에 펼쳐진 정재철 작가의 ‘블루오션 프로젝트’ 전시 현장. 2013~20년 작가가 한국의 동서남 해안과 섬을 돌면서 해양쓰레기, 부유물들을 수집·기록한 결과물과 관련 작품들이 나왔다.
2층 벽에 내걸린 2016년 작 <북해남도해류전도>의 일부분. 동아시아 해역에 빨간 선으로 표기된 해류를 타고 떠다니는 쓰레기와 부유물의 경로를 정교하게 기록하며 드로잉한 지도그림이다. 북한 지역을 해역과 같은 파란빛으로 표기해 아래 남한을 섬처럼 그린 것이 눈에 띈다.
숨지기 4년 전에는 경기도 과천의 재개발 지구 동네로 들어가 사물들을 채취하고 버려진 꽃과 나무, 화분들을 다시 옮겨 심어 온전하게 소생시킨 프로젝트를 벌였고, 이 또한 기록으로 남겼다. 원래 나무를 잘 깎는 조각가로 미술판에서 활동을 시작했지만, 2000년 인도양 모리셔스섬에서 작가 레지던시 생활을 하면서 해변에 밀려온 부유물들을 보며 글로벌 자본주의 사회의 유동하는 사물과 생명의 기운과 활력에 관심이 꽂힌 것이 이런 작업에 몰입하는 계기가 되었다.
유라시아를 노마드처럼 이동하는 예술네트워크 작업으로 한국 현대미술판에 독특한 발자취를 남긴 정 작가의 1주기 기획초대전 ‘정재철: 사랑과 평화’가 서울 대학로 아르코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다. 1층 전시장 한가운데엔 ‘나이트 댄스’ ‘째즈 댄스’란 문구를 노란색 바탕에 인쇄한 댄스교습소 광고 펼침막이 큼지막하게 내걸렸다. 희한하게도 펼침막 가장자리는 우아한 술을 단 터키풍 장식으로 수놓아졌다. 40대 시절 터키에 가서 주민들에게 햇빛가리개용으로 나눠줬더니 그들의 공예적 스타일로 만들어낸 이 키치적 작품은 정 작가 이력을 대표하는 설치작품으로 꼽을 만하다.
2008년 정재철 작가가 감행한 뉴실크로드 프로젝트 당시 답사했던 주요 지역의 장소와 기억을 떠올리며 수묵으로 그린 화첩 그림. 전통회화의 두루마리 그림처럼 10m 넘는 장폭의 종이에 연속적으로 그린 이 작품은 답사 당시 작가의 의식과 감각의 상황까지 펼쳐낸 내면의 기록이기도 하다.
전시가 소개하는 프로젝트는 세가지다. 2004~11년 ‘실크로드 프로젝트’, 2013~20년 ‘블루오션 프로젝트’, 2017년 이후 과천 재개발 동네에서 진행한 ‘로컬에서 살기’ 프로젝트다. 디지털 문명의 시대에 추상화된 문자와 이미지들로만 치환되는 우리의 유목적 삶을 철저한 현장 작업을 통해 되짚는 결과물로, 기록·수집된 작업을 재구성하고 예술적 실천을 복기하는 내용들이다.
‘실크로드 프로젝트’ 당시 작가가 폐펼침막을 파키스탄, 인도, 네팔, 터키 등 중앙·서아시아 실크로드 지역으로 가져가 주민들이 어떻게 사용하는지 기록한 내용들을 사진과 영상으로 선보인다. 폐펼침막은 햇빛가리개와, 가방, 식탁보 등으로 활용됐고, 이는 폐펼침막으로 만든 옷을 입고 런던, 로마, 베를린 등 유럽 도시 광장을 횡단하는 퍼포먼스로도 나타난다.
정재철 작가가 고고학적 시선으로 공동체의 장소성을 탐색했던 과천 가루개 마을에서 가져온 꽃과 나무 화분들. 주민들이 떠나면서 버린 꽃과 나무를 역시 주변에서 수집한 화분에 다시 심어 키우며 되살려낸 이 식물들은 생명과 사물의 힘과 기운을 드러낸 특유의 작품이 됐다.
2층에 전시된 정재철 작가의 드로잉 작품 <자라나는 빛>(2018). 과천 가루개 마을에 버려졌던 꽃과 나무들이 작가의 보살핌으로 화분에서 다시 활기를 얻어 자라는 모습을 추상화한 터치로 그렸다.
‘블루오션 프로젝트’에선 바닷가에서 밀려온 쓰레기들을 부유사물이라고 지칭하면서 거대한 부유물 컬렉션으로 설치적 풍경을 보여준다. 떠내려온 플라스틱병, 폐그물, 부표, 비닐, 라이터 등 실물이 나열되고, 이들이 부유하는 해안가 영상물, 그리고 북한 땅을 해역으로 표기해 남한이 섬처럼 된 동아시아의 부유물 지도 등을 볼 수 있다.
단지 유랑하는 삶과 환경을 중시하는 현장주의자로 그의 작품들을 넘겨짚을 수도 있지만, 작품들을 볼수록 작가는 새로운 시대의 미술의 시각적 상상력과, 시대의 변화에도 변함없는 생명과 사물의 기운에 대해 탐색하려 했음을 깨닫게 된다. 특히 4년 전 버려졌다가 생생하게 살아난 화초와 나무들이 2층 전시장에 마치 고인의 분신처럼 나타난 대목은 감동적이다. 필름 디렉터 백종관 작가가 고인이 남긴 개인 다큐 필름을 재구성해 마치 작가가 독백하는 듯한 영상 작업 <기적소리가 가깝고 자주 들린다>도 주목할 만하다. 29일까지.
글·사진 노형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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