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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음악·공연·전시

허락되지 않은 욕망, 코발트블루

등록 2021-11-06 13:21수정 2021-11-06 13:25

[한겨레S] 신지은의 옛날 문화재를 보러갔다
‘코발트블루: 조선후기 문방풍경’ 특별전

청빈이 덕목인 성리학의 나라에서
법으로 금한 청화백자 즐긴 사대부
부귀영화 등 세속적 바람 좇던 그들
지키지 않는 규칙으로 지탱된 조선
백자청화 화분문 호, 조선 19세기, 서울역사박물관
백자청화 화분문 호, 조선 19세기, 서울역사박물관

뉴트로(신복고)가 유행하며, 새로 연 가게도 옛날식으로 디자인한 간판을 다는 경우가 많아졌다. 샘물체, 엽서체처럼 1990년대를 장악했던 글씨체도 곧잘 여기저기서 다시 보인다. 그러나 디자인이란 신묘한 것이라, 주문하고 만든 이들의 마음이 결과물에서 그대로 드러난다. 과거를 그저 우스운 밈 취급하는 간판을 단 가게는 그 안에서 파는 것들도 별다른 재미를 담아내지 못한다는 걸 지난 몇 해의 경험을 통해 알았다.

뉴트로는 과거에 대한 이해와 존중에서 출발한다. 그러니 수백년, 멀리는 수천년 전의 유물들로 꾸려지는 박물관 전시는 언제나 가장 뛰어난 뉴트로여야 한다. 쉽사리 가늠할 수도 없이 먼 과거에 동시대 사람들의 눈과 귀를 기울이게 만들어야 하기 때문이다. 전시를 준비하는 이들의 고심 끝에, 옛날 문화재는 늘 새롭고도 반가운 이야기로 우리 앞에 나타난다.

경기도자박물관 특별전 ‘코발트블루: 조선후기 문방풍경’은 조선 후기 청화백자들을 통해 당대 사대부들의 취미생활을 들여다본다. 물질적인 것에 재미를 붙이면 본업에 정진할 뜻을 잃는다는 완물상지(玩物喪志)의 규칙은 왕부터 일반 사대부에 이르기까지 지식인이라면 예외 없이 적용되는 것이었다. 영화 <사도>에서 강아지를 그리다 들킨 사도세자를 영조가 호되게 몰아세우는 장면은 그 엄격한 경계심을 잘 보여준다.

그런데 사실 사도세자가 혼쭐나고 있던 그때 한양의 문인들은 이미 전에 없이 완물을 만끽하던 중이었다. 그들은 서화와 도자기를 비롯한 골동품을 모으고, 정원을 가꾸고 명승지로 여행을 다녔다. 수집한 진귀한 물건으로 문방(文房)을 멋지게 꾸며 놓고, 다른 문인들과 감상과 품평을 나누기도 했다. 전시는 이 시기 문방의 풍경, 그 안에 있던 한 가지 색을 통해 완물상지의 균열을 포착한다.

충돌하는 이상과 현실

전시 1부에는 산수화나 사군자, 시구절 등 문인 취향으로 장식된 청화백자들이 소개되어 있다. 당시 인기 있는 수입 열대식물이었던 파초가 그려진 화분 무늬 항아리도 눈길을 끈다. 특히 당시에는 연적이나 필통 같은 문구류까지 값비싼 백자로 갖추는 것이 유행했다. 전시에 소개된 농암 김창협의 글을 보면 아예 직접 디자인해서 문구를 주문 제작하는 프로슈머형 문인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공부만큼 문구에도 ‘진심’이었던 이들의 열정은 어쩐지 오늘날의 문구 수집 유행과도 맞닿는 느낌이라 재미있다. 그러나 당시 문방에 놓인 아름다운 청화백자들은, 모두 불법이었다.

조선 19세기에 만들어진 청화백자 필통, 병, 연적. 각각 아모레퍼시픽미술관, 경기도자박물관,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조선 19세기에 만들어진 청화백자 필통, 병, 연적. 각각 아모레퍼시픽미술관, 경기도자박물관,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15세기 조선의 법전 <경국대전>에 실린 각종 규제 가운데는, 청화백자를 쓰는 양반은 곤장 80대로 다스린다는 법규도 있다. 청화백자에 쓰이는 푸른 코발트 물감은 워낙 값도 비쌌지만, 중국을 통해서만 구할 수 있는 재료였다. 그런 희소성 때문에 청화백자는 국영 백자 가마인 관요에서만 만들어지고, 곧 왕실 권위의 상징이 되었다. 그러나 재미있게도, 이후 <조선왕조실록>은 사회 각계각층이 그 법을 어기는 것을 근심하는 왕과 신하들의 이야기가 이어진다. 무려 수백년 동안이나. 법으로까지 청화백자 수입과 사용을 여러번 금지했음에도 양반들의 청화백자 애호는 꺾인 적이 없다.

전시에서는 이런 문인풍 청화백자가 당시 사람들이 생각한 최상의 여가와 염원을 보여준다고 소개한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법으로 금지된 물건을 소유하고 자랑하는 데 거리낌이 없던 지배층의 문화가 있다. 지켜지지도 고쳐지지도 않은 채 낡아버린 규칙으로 지탱되던 조선 사회의 모습도 그려진다. 그러고 나면 오목조목 진열된 청화백자의 푸른빛을 우리는 조금 다른 결로 바라보게 된다. 본래는 문방에 있어선 안 되는 색이었던 코발트블루가, 아예 그 공간을 대표하게 되어버린 시대의 이야기로 말이다.

백자청화 잉어문 접시, 조선 19세기, 경기도자박물관
백자청화 잉어문 접시, 조선 19세기, 경기도자박물관

‘부귀공명’이라는 소제목을 단 전시 2부는 입신양명, 부귀영화, 무병장수 등 당시 양반들의 희망을 소개한다. 백자에 그려진 다양한 길상무늬의 의미를 하나하나 읽어나가면 슬그머니 웃음이 나온다. 과거급제를 의미하는 잉어, 장수를 뜻하는 십장생, 부귀를 비는 모란. 세 톨짜리 알밤은 영의정과 좌의정, 우의정의 삼정승처럼 영달을 누리길 기원하는 문양이다. 성리학의 덕목인 청빈과는 거리가 먼 저 세속적인 바람들이 이미 그들의 생활에 스며 있었던 것 같다.

이렇게 푸른 무늬 샅샅이 바람을 담아낸 백자들은 학자로서 추구할 덕목을 잊어버린 어떤 삶들을 비춘다. 특히 호화로운 완물로 가득한 방을 묘사한 책가도와 충효·염치 등의 덕목을 그림글자로 푼 문자도를 나란히 배치한 공간은 당시 문인들의 삶에서 현실적 가치와 이상적 가치가 충돌하고 있었음을 직관적으로 보여준다.

책가도(8폭), 조선 19세기, 경기도박물관
책가도(8폭), 조선 19세기, 경기도박물관

우리의 완물과 잃어가는 뜻

이렇게 완물상지를 버린 문인들이 남긴 아름다운 유물들은 오랜 사회적 기치가 퇴색되어가던 한 시대를 보여준다. 완물상지의 경계를 저버린 자리에 선명하게 떠오르는 것은, 그들이 잃어버린 뜻은 무엇이었던가 하는 물음이다. 코발트블루로 채워진 풍경 안에서, 그 덕목들에서는 어쩐지 흔적기관 같은 쓸쓸함이 풍긴다. 이미 뜻과 삶 사이를 이어주는 힘을 잃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문방이 개인적 욕망을 드러내는 공간으로 변모한 것은 앞서 본 완물의 필연적인 결과일까. 그러나 오늘날 우리가 보는 청화백자들은 여전히 아름답다. 아무리 원대한 이상도 몇 해면 빛이 바래고, 사람이 평생 쌓은 덕업도 하루의 악행으로 뒤집히기 일쑤다. 그런데 흘러간 탐심이 남긴 흔적은 이렇게 오래간다는 것에 새삼 마음이 서늘해진다. 어쩌면 완물과 상지는 동시에 쏘아 올린 불꽃이 차례로 모양을 바꾸어가는 것과 다르지 않은 것인지도 모른다.

50여점의 작품들을 둘러보고 나서노라면, 자연스레 2021년을 살아가는 우리의 풍경으로 눈길이 돌아간다. 여전히 쌓고 모으느라 골몰하는 사회가 만드는 거대한 완물의 광경. 거기 없는 것은 무엇인지, 유리벽 너머 푸른빛은 몇번이나 다시 질문을 던진다.

신지은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실 연구원

박물관과 미술관의 문화재 전시나 전통문화를 주제로 한 전시를 소개합니다. 우리 문화재를 사회 이슈나 일상과 연결하여 바라보며, 보도자료에는 나오지 않는 관람 포인트를 짚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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