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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음악·공연·전시

고려 주자, 마음의 온기를 기울이다

등록 2021-12-04 15:28수정 2021-12-04 15:41

[한겨레S] 신지은의 옛날 문화재를 보러 갔다
호림박물관 신사분관 특별전

안에 든 것이 변해버리기 전에
따라내고 함께 나누게 한 주자
따뜻함 유지해주는 승반과 함께
‘소통’의 의미와 정취 느끼게
청자 표형 주자. 고려 12세기, 보물 1540호. 호림박물관 신사분관 제공
청자 표형 주자. 고려 12세기, 보물 1540호. 호림박물관 신사분관 제공

주자는 술이나 물 등을 담아 따르게 만든 그릇이다. 생김새는 오늘날 쓰이는 주전자와 똑같지만, 끓이는 용도로는 쓰지 않았다는 차이가 있다. 호림박물관 신사분관의 특별전 ‘따르고 통하다, 고려주자’는 청자를 비롯한 다양한 고려의 주자들을 소개하는 전시이다. 출품된 작품이 모두 210여점, 그중에서 고려 시대에 만들어진 주자가 133점에 이르는 대규모 기획전시다.

옛 기록에 따르면 주자가 발명되기 전까지 사람들은 술을 따를 때 항아리와 국자를 사용했다고 한다. 이에 비하면 항아리에 깔때기, 손잡이까지 붙여놓은 주자는 얼마나 편리한 물건이었을까. 도자기 가운데서도 만들기가 가장 까다로운 기종이라지만, 문명의 작은 한 발짝엔 뒷걸음질이 없는 법. 게다가 깨끗하고 날렵하게 액체를 따를 수 있는 아름다운 주자는 그 존재 자체로 자리의 격을 높여주었을 것이다. 고려 시대에 주자가 많이 만들어진 것은 각종 의례가 발달하고, 차와 술을 즐기는 것이 유행했던 당시 문화의 영향이 크다.
‘따르고 통하다, 고려주자’ 전시 전경. 호림박물관 신사분관 제공
‘따르고 통하다, 고려주자’ 전시 전경. 호림박물관 신사분관 제공

주자는 밀봉이 되지 않으므로 내용물을 오래 보관하는 용도로는 적합하지 않다. 영영 담아만 두는 것이 아니라, 안에 든 것이 변해버리기 전에 따라내고 나누어야 한다. 그래서 전시는 주자의 따르는 기능에 소통이라는 의미를 부여한다. 그 맥락은 현대미술과 고려청자를 함께 진열한 연계전시로도 이어지며, 뚜렷한 정의로 드러나지 않는다. 가볍게 펼쳐 든 1만자짜리 자기소개서 같은 전시 안에서, 각자가 발견하는 단서들을 따라 저마다의 소통의 의미에 도달하는 것은 관람객의 몫이다.

소통의 온도는 너무 뜨겁지 않게

이 전시는 총 3부로 구성되어 있다. 고려 주자의 변모를 시간순으로 훑어본 뒤, 다시 쓰임새에 따라 술그릇과 다기로 구분한 유물과 참고자료들을 살피는 방식이다. 1부 ‘고려 공예의 꽃, 주자’는 늠름한 청자 주자(보물)로 출발한다. 금속기의 매끈한 모서리까지 본뜬 세련된 맵시가 일품이다. 고려청자의 제작 기술이 첫 전성기를 맞이하는 길목에 접어든 11세기 후반의 청자 모습을 잘 보여준다.
청자 죽순형 주자와 승반. 고려 12세기. 호림박물관 신사분관 제공
청자 죽순형 주자와 승반. 고려 12세기. 호림박물관 신사분관 제공

술그릇으로 쓰인 유물들을 모은, 2부의 죽순 모양 주자와 승반은 그중에서도 눈에 들어오는 작품이었다. 12세기에 만들어진 이 주자는 죽순이 자라면서 대나무 껍질 끝이 살짝 뒤집어지며 올라오는 디테일까지 섬세하게 표현되어 있다. 고려청자에서만 나타나는 독창적인 디자인에 산뜻한 비색이 어우러져, 보는 이의 마음에도 생명력 넘치는 봄날의 기운을 불어넣는다. 겨울 초입에 가장 그리운 것은 막 지나간 가을보다 한참 먼 봄이어서일까, 쟁쟁한 국보와 보물 사이에서도 한참을 들여다보게 한다.

한편 이 주자는 바특하게 아래를 받친 승반이라는 대접과 한 벌을 이룬다. 승반의 용도는 안에 주자를 앉혀놓고 뜨거운 물을 부어가며 내용물을 덥히는 것이다. 불에 직접 가열하지 않고 은근하게 따뜻함을 유지하는 이러한 쓰임새는 이 전시의 키워드인 ‘소통’을 또 다른 맥락에서 보여준다. 상대방을 다치게 하는 펄펄 끓는 마음이 아니라 서로를 따스하게 채워주는 알맞은 온도를 주고받는 것이 소통이라는 것 말이다.

이런 온도감을 가늠하며 둘러보면, 전시실 한편에 연출된 고려 시대 술집도 한층 생생한 풍경으로 와닿는다. 붉은 탁자 위아래로 술항아리와 주자, 술잔 등을 배치한 공간이다. 주자를 사용하며 마실 것을 나누고 어울리던 옛사람들의 정취가 따뜻한 술 한잔이 그리워지는 지금 계절 속에서 아른아른 되살아나는 기분이 든다.

‘따르고 통하다, 고려주자’ 특별전에서 고려 시대 주점을 재현한 전시. 호림박물관 신사분관 제공
‘따르고 통하다, 고려주자’ 특별전에서 고려 시대 주점을 재현한 전시. 호림박물관 신사분관 제공

주자와 뚜껑: 오래 남은 처음의 다짐

주자의 뚜껑과 몸체는 따로따로 만들고 구워진다. 가마에서 구워지는 동안 흙에 머금었던 수분과 공기가 빠져나가면서, 도자기는 굽기 전보다 크기가 20% 정도 작아진다. 그런데 가마에 다 같이 들어갔다 나와도 수축되는 정도는 서로 미세하게 다르다. 그래서 흙으로 빚어 놓았을 때는 꼭 맞던 것도, 가마에서 나온 뒤엔 서로 맞지 않을 수 있다.

또 솜씨 좋게 뚜껑과 한 벌로 맞춰놓은 주자였어도 오늘날까지 전해 내려오는 사이 뚜껑이 없어지기도 한다. 그래서 옛 도자기들 중에는 후대에 잘 어울리는 뚜껑을 찾아 새로 짝을 맞춘 듯한 것들도 종종 보인다. 뚜껑을 잃어버리면 골치임을 고려 사람들도 알았던지, 주자의 몸통과 뚜껑에 끈을 묶을 수 있는 고리가 붙어 있는 것들도 많다.

오랜 시간 호된 불기를 맞으며 성질과 모습이 변화한 뒤에도 똑 떨어지는 합으로 남기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욕심에 열띤 마음은 절제를 이기고, 처음 다짐을 놓치고 허둥대길 몇번이고 반복하며 살아간다. 뚜껑이 덮인 도자기를 볼 때마다, 처음 미술사를 공부하던 때의 눈으로 돌아가 ‘뚜껑이 잘 맞네’ 하고 조그맣게 감탄하곤 한다.

청자 표형 주자. 고려 12세기, 보물 1540호. 호림박물관 신사분관 제공
청자 표형 주자. 고려 12세기, 보물 1540호. 호림박물관 신사분관 제공

긴 세월 동안 얌전히 제 뚜껑을 이고서 온 주자들을 보며, 내 세계를 이루고 있는 크고 작은 합들을 떠올려본다. 하루는 길고 한해는 짧은 삶 속에서 우리를 우리이게 하는 인연들 말이다. 수많은 계절들을 맞이하고 보내는 동안 내게 남은 것, 새로 얻은 것이 무엇인지 돌아보며 세밑이 다가온 것도 새삼 실감하게 된다.

8월에 시작된 특별전을 이달에 소개하는 이유는, 이 전시가 올해와 함께 끝나기 때문이다. 우리처럼 차를 좋아하고 술을 좋아했던 수백년 전 멋쟁이들이 남긴 주자를 마주하며, 오늘날 우리는 무엇에 마음을 기울이고 있나 생각에 잠겨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운이 좋으면 올해 다 따라내지 못한 채 식어가던 이야기를 내 안에서 발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전시를 보고 도산대로의 찬바람 속으로 다시 나설 때, 전시에 걸린 당나라 시인 이하의 ‘장진주’(將進酒) 한 구절이 마음에 맴돌았다. “권커니 그대여 종일 마시고 취하게나.” 내년에도 우리는 아침이면 같은 길을 따라 일터로 가고, 밤이 되면 이불 속을 파고들며 같은 자세로 잠들 것이다. 마지막 한 방울까지 남은 날들에 마음속 온기를 기울여보는 12월이다.

신지은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실 연구원

박물관과 미술관의 문화재 전시나 전통문화를 주제로 한 전시를 소개합니다. 우리 문화재를 사회 이슈나 일상과 연결하여 바라보며, 보도자료에는 나오지 않는 관람 포인트를 짚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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