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광고

광고닫기

광고

본문

광고

문화 음악·공연·전시

호랑이 기운 듬뿍 받아, 두루 평안하시길

등록 2022-01-01 17:24수정 2022-01-01 17:47

[한겨레S] 신지은의 옛날 문화재를 보러 갔다
국립민속박물관 ‘호랑이 나라’
작호도, 19세기(세부). 국립민속박물관 제공
작호도, 19세기(세부). 국립민속박물관 제공

살아가는 동안 수없이 반복하며 식상해질 법도 한데, 평생을 두고 새롭게 감격하는 것들이 있다. 예를 들면 새해 첫날의 해돋이나,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라는 아홉 글자 인사. 이것들이 특별한 의미를 잃지 않는 이유는 어쩌면 1년에 한번이라는 조건 때문인지도 모른다. 질릴 사이 없이 지나가는 새해의 기쁨들. 매년 국립민속박물관에서 열리는 띠 특별전을 보러 쨍한 겨울바람을 맞으며 경복궁 돌담길을 걸어가는 일은 내게는 일상 속에서 맞이하는 해돋이 같은 것이다. 사람들이 어제도 뜨고 졌던 그 해를 보러 어슴푸레한 산을 오르고 바닷가로 달려가듯이, 옛것도 새롭게 보러 가는 일 자체가 1월이 베푸는 설렘과 기쁨일 것이다.

국립민속박물관의 새해 전시는 해마다 12간지의 동물들을 하나씩 차례차례 소개한다. 12년에 걸쳐 한 바퀴를 도는 이 시리즈 전시는 임인년 호랑이해 기념 전시인 ‘호랑이 나라’로 두번째 완주를 마친다.

대문에 붙인 ‘문배’에선 복 부르고
병풍·가마는 용맹 자랑하는 영물
사람 같은 감정의 존재라는 상징에
공동체에서 더불어 사는 마음 담겨

나쁜 기운 물리치는 작호도

옛사람들은 정월 초하루가 되면 새해를 축하하는 그림인 세화로 집 안 곳곳을 장식했다. 특히 나쁜 기운을 물리치고 복을 불러들이기 위해 대문에 그림이나 글자를 붙이는 문배라는 풍습이 있었다. 오늘날 ‘까치호랑이’라고 풀어 부르는 작호도는 대문 양쪽에 호랑이와 용을 그려 붙이는 용호문배도와 함께 문배 그림 중에서도 인기 있는 소재였다.

이 전시에는 두 점의 작호도가 나와 있다. 한 점은 까치에게 강퍅하게 성을 내는 익숙한 호랑이의 모습인데, 눈이 더 쏠리는 것은 그 옆에 걸린 19세기 표범 그림 쪽이다. 호랑이 그림인데 표범이 그려져 있는 이유는, 옛날에는 호랑이와 표범을 구분하지 않고 모두 범으로 불렀기 때문이다.

그림 속 범은 물구나무를 서듯 뒷발을 하늘로 휙 들고, 두툼한 꼬리를 움직여 몸의 균형을 잡고 있다. 바위 사이를 날렵하게 뛰어넘는 순간을 포착한 것 같은 그림이다. 머리와 몸통 사이에 어색하게 끼어 있는 앞발이나, 기러기처럼 뒷목이 홀쭉한 까치의 생김새는 너무 옹색해 웃음이 난다. 그러나 잔뜩 신이 나서 눈과 입이 치켜 올라간 표범의 얼굴은 바라볼수록 기특하고 사랑스러운 느낌을 준다. 커다란 도약을 성공해낸 기쁨과 자랑이 어린아이처럼 만면에 솔직하게 드러나 있기 때문이다. 그림을 보는 이쪽에서도 “아이고 장하다” 하고 아낌없이 호들갑을 떨며 동글납작한 뒤통수를 쓰다듬어주고 싶어진다.

‘생존 위협’ 긴장이 낳은 두 얼굴

19세기 말 이사벨라 비숍이 남긴 여행기에는 ‘조선은 반년은 사람이 호랑이를 사냥하고, 반년은 호랑이가 사람을 사냥한다’는 표현이 등장한다. 이렇게 사람과 호랑이가 서로 생존을 위협하는 긴장 관계에서 만들어진 우리 문화 속 호랑이는 두 얼굴을 가지고 있다. 절대 만나고 싶지 않은 두려움의 대상이자, 괴력과 용맹함으로 사람들을 보호해주는 상징이기도 했다.

사진엽서, 1906~1907, 헤르만 산더 수집, 슈테판 산더 기증. 국립민속박물관 제공
사진엽서, 1906~1907, 헤르만 산더 수집, 슈테판 산더 기증. 국립민속박물관 제공

호피도 병풍과, 호피가 그려진 가마 덮개는 ‘지켜주는 호랑이’ 이미지를 잘 보여주는 유물들이다. 호피도 병풍은 네폭짜리 병풍에 글귀 한줄 없이 표범 무늬를 빼곡하게 그려놓은 그림병풍이다. 마치 커다란 표범 가죽을 턱턱 걸쳐놓은 것 같은 박력은, 으레 병풍 하면 떠오르는 산수화나 꽃 그림 같은 점잖은 그림들과는 전혀 다른 재미를 준다. 여덟 폭, 열두 폭짜리 호피도 병풍을 사치스레 펼쳐놓은 어느 무관의 집 안도 상상해보게 된다.

조선 시대 신부가 타던 혼례용 가마와 그 위를 덮는 호랑이 그림 덮개 옆에는 20세기 초 외국인이 촬영한 신부 행차 사진도 전시되어 있다. 조그만 흑백사진 속을 들여다보면, 호랑이 가죽을 걸친 가마의 위풍이 선명하다. 보급형 호피 같은 호랑이 그림 덮개에는 호랑이의 위용을 빌려 먼 거리를 무사히 이동하길 바라는 기원도 담겨 있다.

사인교와 가마 덮개, 20세기 초. 국립민속박물관 제공
사인교와 가마 덮개, 20세기 초. 국립민속박물관 제공

호피도 병풍, 조선 시대. 국립민속박물관 제공
호피도 병풍, 조선 시대. 국립민속박물관 제공

반면 사진가 김수남이 1980년대에 포항 강사리 마을에서 촬영한 범굿 사진을 이은 영상은 호랑이에 대한 두려움이 전해지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특히 종이로 만든 범탈을 뒤집어쓴 사람이, 범이 닭을 물어 가는 모습을 연기하는 장면은 보는 순간 소름이 돋을 만큼 강렬한 힘이 넘친다. 이러한 굿이 탄생하고 이어지기까지 마을 공동체의 집단 기억에 새겨졌을 숱한 호환의 체험을 오늘날 사람들도 간접적으로나마 느껴보게 한다.

강사리 범굿의 호랑이, 1981년, 김수남 촬영. 김수남기념사업회 제공
강사리 범굿의 호랑이, 1981년, 김수남 촬영. 김수남기념사업회 제공

동물도 그러한데 하물며 사람은…

전시 제목인 ‘호랑이 나라’는 최남선의 글에 등장하는 표현인 ‘호담국’(호랑이 이야기의 나라)을 연상시킨다. 한국학중앙연구원의 전신인 한국정신문화연구원이 1970년대부터 전국을 조사한 결과, 우리나라에서 전해지는 호랑이 이야기는 무려 1천여건에 달했다. 좋아하는 것도 싫어하는 것도 모두 이야기로 표현하고 마는 게 사람의 마음이니, 수많은 호랑이 이야기만큼 옛사람들의 유난한 애증을 잘 보여주는 것도 없을 것이다.

게다가 오늘날까지 천개의 이야기로 남아 이어진 호랑이의 흔적은 마치 사람과 진배없는 마음과 감정을 지닌 존재로 그려져 있어 흥미롭다. 울산에는 이런 호랑이 이야기도 전해진다. 나물 캐던 아낙들이 새끼 호랑이를 구경하다가 어미 호랑이를 보고 줄행랑을 쳤는데, 이튿날 자고 일어나 보니 호랑이가 아낙들이 두고 간 신발과 바구니를 각자의 집에 물어다 놓았다는 것이다. 이 이야기의 가장 매력적인 디테일은, 새끼를 보고 예쁘다는 칭찬을 하지 않은 집은 호랑이가 바구니를 갈가리 찢어서 던져놓았다는 것이다. 다른 사람이 제 자식을 칭찬하면 기뻐하고, 귀하게 여겨주지 않으면 서운함을 품는다. 사람과 다를 바가 없는 호랑이 이야기를 들은 사람들은 어떤 생각을 했을까? 과연 호랑이는 영물이라는 짧은 감탄 뒤에 “동물도 그러한데 하물며 사람은 어떻겠는가?” 하는 조심을 새기지 않았을까.

삼재 부적판, 조선 시대. 국립민속박물관 제공
삼재 부적판, 조선 시대. 국립민속박물관 제공

전시에 나온 70여점의 전시품 가운데 가장 좋은 하나를 꼽으라면, 나무로 만든 호랑이 부적 스탬프를 꼽고 싶다. 호랑이 부적은 삼재를 막아주는 힘이 있다고 여겨지는데, 전염병이 돌 때면 마을 공동으로 부적 목판을 만들어두고, 여러 사람이 필요한 만큼 부적을 찍어낼 수 있게 했다고 한다. 행운도 불행도 무한히 개인의 책임으로 돌리고 싶어 하는 시대에, 나눠 쓰는 손으로 닳은 나무판을 바라보는 기분은 묘하다. 베갯모에, 담배합에, 매일 드나드는 문짝에까지 담긴 수많은 상징 속에서 우리가 마지막으로 발견하고 공유하게 되는 것은 호랑이가 아닌 공동체에서 더불어 살아가는 사람들의 마음이다.

이 전시가 전하는 메시지는 간명하고도 보드랍다. ‘호랑이의 기운을 듬뿍 받아 가내 두루 평안하길 바란다’는 나긋한 덕담이다. 문화재를 좋아하는 사람들, 박물관에 가는 길이 설레는 이들이라면 우리 전통의 세계에서 보내오는 큼직한 연하장을 받으러 나서볼 때이다.

박물관과 미술관의 문화재 전시나 전통문화를 주제로 한 전시를 소개합니다. 우리 문화재를 사회 이슈나 일상과 연결하여 바라보며, 보도자료에는 나오지 않는 관람 포인트를 짚어봅니다.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
언론 자유를 위해,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한겨레 저널리즘을 후원해주세요

광고

광고

광고

문화 많이 보는 기사

친자 인정한 정우성…29일 청룡영화제 예정대로 참석 1.

친자 인정한 정우성…29일 청룡영화제 예정대로 참석

“어무이 부르면, 오이야 오이야…” 국어 교과서 실리는 할머니 시 2.

“어무이 부르면, 오이야 오이야…” 국어 교과서 실리는 할머니 시

네이버웹툰 ‘이세계 퐁퐁남’ 비공개 처리…“여성 혐오” 신고 누적에 3.

네이버웹툰 ‘이세계 퐁퐁남’ 비공개 처리…“여성 혐오” 신고 누적에

‘가왕’은 현재형…늦가을 밤 뜨겁게 달군 조용필의 명품 무대 4.

‘가왕’은 현재형…늦가을 밤 뜨겁게 달군 조용필의 명품 무대

베일 벗은 뮤지컬 ‘알라딘’…소문난 잔치에 볼거리 많네 5.

베일 벗은 뮤지컬 ‘알라딘’…소문난 잔치에 볼거리 많네

한겨레와 친구하기

1/ 2/ 3


서비스 전체보기

전체
정치
사회
전국
경제
국제
문화
스포츠
미래과학
애니멀피플
기후변화&
휴심정
오피니언
만화 | ESC | 한겨레S | 연재 | 이슈 | 함께하는교육 | HERI 이슈 | 서울&
포토
한겨레TV
뉴스서비스
매거진

맨위로
뉴스레터, 올해 가장 잘한 일 구독신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