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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음악·공연·전시

산울림 둘째 김창훈 “‘아니 벌써’ 가사가 바뀐 이유는…”

등록 2022-02-08 11:49수정 2022-02-08 12:00

[삼형제 그룹 ‘산울림’ 베이시스트 김창훈 인터뷰]
45년간 사랑받는 이유, ‘산할아버지’ 등 동요작업 계기 풀어놔
기업임원 퇴직뒤 유튜브에 시에 작곡 입힌 시노래 작업 공개
산울림 김창훈이 1월26일 강남의 한 카페에서 자세를 취하고 있다. 정혁준 기자
산울림 김창훈이 1월26일 강남의 한 카페에서 자세를 취하고 있다. 정혁준 기자

‘산울림’ ‘삼형제’ ‘세가지’.

설날 직전 산울림 김창훈을 인터뷰했을 때 비슷한 느낌이 나는 세 단어가 떠올랐다.

김창훈은 문득 산울림이 결성한 지 45년이 지나도 많은 이들에게 사랑받는 이유 세가지가 무엇인지를 물었다. 그는 스스로 묻고, 스스로 답했다.

“세가지라고 봅니다. 첫째는 형(김창완)의 중단 없는 활동이죠. 형은 뮤지션에서 더 나아가 연기, 라디오 디제이, 저술, 그림 등을 통해 대중과 소통하고 교류했죠. 그러면서 산울림을 대중에게 기억하게 했어요.” 어수룩해 보이는 옆집 아저씨 같은 그의 형 김창완이 생각났다.

“둘째는 후배 뮤지션들이 산울림 노래를 재해석해 많은 리메이크작을 만들었던 점이라고 봐요. 그런 후배 뮤지션들 덕에 산울림 노래가 계속 소비되고 있는 것이죠.” 아이유가 부른 ‘너의 의미’가 문득 떠올랐다.

“셋째는 아직도 산울림을 좋아하고 지지해주는 ‘산울림매니아’를 중심으로 한 팬층이라고 생각합니다.” 2003년 결성된 팬클럽 산울림매니아(산매)는 지금도 활동 중이다.

김창훈은 산울림과 떼려야 뗄 수 없는 존재다. 김창훈(보컬, 베이스)은 형 김창완(보컬, 기타), 동생 김창익(드럼)과 함께 삼형제 밴드 산울림을 만들어 1977년 데뷔했다.

“서울 흑석동 재개발 동네에 살았죠. 평일엔 학교에 가고, 주말에 삼형제가 놀이처럼 음악을 했어요. 형은 기타를 쳤고, 저는 우연히 베이스 알게 돼 그걸 쳤고, 막내는 할 게 없으니 사전, 참고서, 공책을 두드리면서 놀았죠.”

산울림 멤버들. 왼쪽부터 김창훈·김창완·김창익. <한겨레> 자료 사진
산울림 멤버들. 왼쪽부터 김창훈·김창완·김창익. <한겨레> 자료 사진

삼형제는 1977년 처음으로 열린 엠비시(MBC) 대학가요제 예선에 출전했으나, 김창완이 대학을 졸업한 상태여서 자격 미달로 본선에는 나가지 못했다. 대신 서울대에 재학 중이던 김창훈이 작사·작곡한 ‘나 어떡해’를 같은 학교 그룹 샌드페블즈가 불러 대상을 차지했다.

“그때 대학교 3학년이었죠. 후배들이 처음으로 열리는 대학가요제에 참가하고 싶다고 했죠. 여름 내내 연습한 뒤 출전했는데, 참가팀 수준이 너무 높았어요. 우리는 장려상만 타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장려상 때 이름을 부르지 않아서 짐을 싸고 나갈 준비를 했어요. 그런데 대상에서 우리 이름이 불렸던 거죠.”

샌드페블즈 이름을 부른 사람은 대회 사회자였던 이수만이었다. 이수만도 샌드페블즈(2기) 출신으로 김창완과 동기였고, 김창훈(5기)은 동아리 후배였다.

여기서 용기를 얻은 삼형제는 그들만의 추억을 담기 위해 기념으로 앨범 하나 만들자고 의기투합했다. “형이 카세트테이프에 녹음해서 레코드 회사에 찾아갔죠. 한 레코드 회사에서 녹음하자고 연락이 왔어요. 당시 앨범 내는 데 200만원 들었거든요. 그때 우리는 돈이 없었어요. 그런데 그 레코드 회사에서 돈을 대주겠다는 거예요. 웬 떡인가 싶었죠.”

앨범이 나오기 전에 밴드 이름을 만들어야 했다. “우리 형제는 서양적인 이름이나 심오한 의미를 지닌 이름인 ‘무이’(無異)로 정하고 싶었어요. 근데 레코드사 사장이 무이는 너무 어렵다며 ‘산울림’이라는 이름을 제안했습니다. 처음엔 촌스러웠어요. 시간이 지나면서 산울림과 삼형제가 비슷하게 느껴졌고, 자연적인 느낌이라서 점점 좋아졌죠. 산울림은 축복받은 이름이라고 생각해요.”

1977년 발매된 &lt;산울림 1집&gt;. 서라벌레코드 제공
1977년 발매된 <산울림 1집>. 서라벌레코드 제공

‘아니 벌써’를 타이틀곡으로 정한 첫 앨범은 1977년 크리스마스 직전인 12월15일 나왔다. 삼형제에겐 크리스마스 선물이었던 셈이다. 엘피(LP)를 집에 있던 전축 턴테이블에 올려놓았을 때 느낀 미묘한 흥분은 평생 잊을 수 없는 추억이 됐다.

산울림 1집은 타이틀곡 ‘아니 벌써’의 인기에 힘입어 2주 만에 40만장이나 팔릴 정도로 빅히트를 쳤다. ‘아니 벌써’는 사이키델릭 록과 펑크를 조합한 노래였다. 뭉개지는 듯한 전기 기타 소리와 김창완의 맑은 보컬, 통통 튀는 베이스 리듬이 어우러졌다.

공연 중인 산울림. 왼쪽부터 김창완·김창익·김창훈. &lt;한겨레&gt; 자료사진
공연 중인 산울림. 왼쪽부터 김창완·김창익·김창훈. <한겨레> 자료사진

‘아니 벌써’ 가사는 “아니 벌써 해가 솟았나/ 창문 밖이 훤하게 밝았네”로 경쾌한 아침을 그린 노래처럼 보이지만, 원래 가사는 “아니 벌써 밤이 깊었나/ 이 친구 벌써 취했나”였다. 검열에 걸려 바뀌게 된 것이다. 유신정권이 시퍼렇게 살아 있던 때였다.

“원래는 온종일 술을 먹다가 ‘벌써 밤이 깊었나’라는 가사였죠. 검열에 걸려 가사가 바뀐 거였습니다.” 다행히도 제목인 “아니 벌써” 대목은 고쳐지지 않았다.

당시만 해도 지금의 휴대전화 가게처럼 동네마다 레코드 가게가 있었다. “동네 레코드 가게에서 산울림 노래가 흘러나왔죠.” 그때 다방은 음악감상실을 겸했다. 다방에서 음악을 틀어주는 디제이가 큰 인기를 끌 때였다. 디제이연합회가 요즘 대형 기획사처럼 힘이 있었다. 산울림은 디제이연합회 초청으로 불려 나가기도 했다.

공연 중인 산울림 김창훈. &lt;한겨레&gt; 자료사진
공연 중인 산울림 김창훈. <한겨레> 자료사진

1집이 이렇게 인기를 끈 이유는 무엇이라고 생각할까? 이 역시 세가지였다. “첫째는 바로 젊은이들의 갈증을 터치한 거였죠. 산울림이 나오기 전까지는 젊은이들이 좋아할 만한 취향의 가요가 많지 않았어요.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은 서양 음악을 들었는데 뭔가 아쉬움을 느꼈죠. 산울림 노래는 서양 밴드 요소를 더했고 우리가 알아들을 수 있는 가사로 노래했어요. ”

나머지 이유는 뭘까? “둘째는 산울림이 젊은이들과 세대차이가 별로 나지 않았다는 점에 따른 동질감 같습니다. 노래를 듣는 이에겐 형, 오빠 같은 느낌이었죠. 실제로 고등학교에서 열리는 행사에 많이 초대받았어요. 셋째는 당시만 해도 대중가요에 대한 사회적 편견이 있었는데, 산울림은 살짝 비켜서 있었죠. 그때 가수를 ‘딴따라’라고 했어요. 그런데 우리는 조금 색이 달랐고, 기존 가요와도 달랐죠. 그런 차별화가 어필한 것 같습니다.”

산울림. 왼쪽부터 김창훈·김창익·김창완. &lt;한겨레&gt; 자료사진
산울림. 왼쪽부터 김창훈·김창익·김창완. <한겨레> 자료사진

산울림은 가요 말고도 ‘개구장이’ ‘산할아버지’ 같은 동요를 발표해 인기를 끌었다. 동요를 한 계기는 무엇일까? “우리가 작사·작곡한 노래의 정서에는 동시 같은 요소가 있었어요. 그땐 어린이들은 어른의 사랑 노래를 부르며 놀았어요. 저희 나름대로 그게 불편했어요. 마침 1979년은 세계 아동의 해였는데, 이를 축하하는 의미로 동요 앨범을 낸 것이었죠.”

1979년 발매된 산울림의 첫 번째 동요 앨범 &lt;개구장이&gt;. 서라벌레코드 제공
1979년 발매된 산울림의 첫 번째 동요 앨범 <개구장이>. 서라벌레코드 제공

산울림이 세대를 넘어가면서도 여전히 인기를 끄는 이유 가운데 하나는 그들이 동요를 불렀다는 점이다. “산울림 동요를 들으며 자란 세대가 기성세대가 되면서 산울림 노래를 자연스럽게 다시 들으며 좋아해 주었죠. 많은 이들이 산울림에 공감하게 한 건 동요였어요.”

가수 김완선(왼쪽)과 강수지. 이정용 기자
가수 김완선(왼쪽)과 강수지. 이정용 기자

김창훈은 산울림 활동을 한 뒤 식품회사에 입사했다. 직장에 다니면서 김완선 1·2집을 프로듀싱하는 등 틈틈이 음악 활동을 이어갔다. “1985년에 식품회사 대리급으로 일하고 있었는데, 김완선의 이모(한백희)로부터 뜬금없이 연락이 왔어요. 조카 데뷔 앨범을 만들어달라고 했죠. 그동안 모아둔 곡이 있어서 만든 거였죠.”

김완선은 화려한 춤, 독특한 음색과 창법으로 김창훈이 작사·작곡한 ‘오늘 밤’과 ‘나홀로 뜰 앞에서’를 불러 큰 인기를 끌었다.

2005년 12월 서울 마포구 합정동의 한 스튜디오에서 공연에 앞서 연습 중인 산울림. 왼쪽부터 김창완·김창익·김창훈. 강재훈 기자
2005년 12월 서울 마포구 합정동의 한 스튜디오에서 공연에 앞서 연습 중인 산울림. 왼쪽부터 김창완·김창익·김창훈. 강재훈 기자

그 뒤 미국 주재원으로 생활하다, 2006년 산울림 30주년을 맞아 삼형제가 다시 모여 14집 앨범을 준비했다. 하지만 그해 막내 김창익이 캐나다에서 불의의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나면서 산울림은 해체됐다. 삼형제는 데뷔할 때 100집까지 내자고 했지만, 13집 앨범이 그들의 마지막이 됐다.

김창훈에게 가장 기억에 남은 산울림 노래가 무엇인지를 물었다. “3집에 발표한 거친 노래 ‘내마음(내마음은 황무지)’이 있어요. 처음으로 보컬리스트로 데뷔한 곡인데 하드록적인 곡으로 평가받았죠. 같은 앨범의 ‘그대는 이미 나’는 18분40초짜리 노래인데, 젊은 패기로 연주한 노래였죠. 7집의 ‘독백’은 애착이 가는 노래인데, 언제 어디서나 불러드리고 싶은 노래입니다. 마지막은 마지막 13번째 앨범에 들어 있는 ‘내가 왜 여기 있는지 몰라’인데 아쉬운 노래입니다.”

유튜브에서 시노래를 부르고 있는 김창훈. 산울림TV 갈무리
유튜브에서 시노래를 부르고 있는 김창훈. 산울림TV 갈무리

식품회사 임원까지 한 그는 몇 년 전 은퇴했다. 그는 지난해 5월부터 유튜브 채널 ‘산울림티브이(TV)’에 시를 노래로 만든 시노래를 올리고 있다.

시노래를 유튜브에 올리는 이유는 무엇일까? “패션 디자이너는 옷감이 있어야 좋은 옷을 만들 수 있죠. 가수에게 옷감은 가사를 쓰기 위한 글감입니다. 작곡하려는 열망은 강한데 이런 열망을 담을 좋은 글감이 필요했어요. 그러다 시집을 보게 된 거죠. 저에겐 보물섬 같았죠.”

정현종 시인의 ‘방문객’을 처음 시노래로 만들어 올렸다. 그가 올린 시노래를 보면, 정호승의 ‘풍경 달다’, 기형도의 ‘빈집’, 김수영의 ‘사랑’, 신현림의 ‘7초간의 포옹’, 안도현의 ‘너에게 묻는다’, 천상병의 ‘귀천’, 윤동주의 ‘편지’, 백석의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등 167곡(2월7일 현재)에 이른다.

그는 시로 노래를 만들면서 시 한구절이 백마디 말보다 더 강하게 다가왔다고 했다. “마종하 시인의 ‘딸을 위한 시’, 박철 시인의 ‘딸들에게’를 노래로 만들었죠. 백마디 교육적인 말보다 시 한구절이 가슴에 더 와 닿아요. 자녀 교육을 위해서도 가슴에 새겨 놓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죠.”

김창훈과 시는 ‘하릴없이’ 만날 운명인 듯하다. “산울림 때부터 어려운 말은 피하고 되도록 우리가 알고 있는 쉬운 한글로 노래를 만들었죠. 의미를 잘 모르면 사전도 꼭 찾아봤어요. 산울림의 노래 ‘독백’ 가사 중에 ‘하릴없이 이리저리 헤매다, 나 홀로 되어 남으리’가 나옵니다. 가사에서 ‘하릴없이’는 ‘할 일이 없이’가 아니라 ‘어쩔 수 없이’라는 뜻이거든요. ‘틀림없이’라는 뜻도 있죠. 이렇게 정확한 뜻을 알아야 노래 분위기와 의미를 정확하게 표현할 수 있습니다.”

시노래를 만들면서 시의 영향력을 알게 됐고, 시의 선한 영향력이 더 많은 사람에게 다가갔으면 좋겠다는 말도 했다. “그동안 저는 제 이야기만 음악으로 만들었습니다. 제 창작력에 스스로 만족하는 데만 몰두한 거였죠. 이젠 조금 달라졌어요. 사실 시노래를 계속 만드는 작업이 쉽지는 않아요. 하지만 저는 타인을 위한 이타적인 작업이라고 생각하며 만들죠. 시는 많은 사람에게 풍성한 심성을 갖게 해주는 도구라고 생각하니까요.”

가수와 시인은 닮은 점이 있다고도 했다. “시인은 외로운 작업을 하는 사람인 것 같아요. 작사나 작곡을 하는 가수도 마찬가지죠. 시노래를 만들면서 시인과 동행하는 느낌이 들어요. 시인의 외로움을 소개하고 싶기도 하고요.”

산울림 김창훈이 1월26일 강남의 한 카페에서 &lt;한겨레&gt;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정혁준 기자
산울림 김창훈이 1월26일 강남의 한 카페에서 <한겨레>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정혁준 기자

김창훈은 시인에게 시노래를 만들어도 괜찮은지를 묻기 위해 연락을 하는데, 그러다 알게 된 시인도 있었다. 맹문재 시인의 ‘아름다운 얼굴’을 시노래로 만들 때 연락을 하면서 두 사람은 자연스레 가까워졌다. “맹 시인님의 시에 ‘사라지는 윤슬의 얼굴’이 나와요. 그때 윤슬이라는 말의 뜻을 알게 됐죠. 윤슬은 ‘햇빛이나 달빛에 비쳐 반짝이는 잔물결’이란 아름다운 우리말이란 걸요.”

모든 시를 노래로 만들지는 않는다고도 했다. 그는 친일파 시인과 군사정권에 부역한 시인의 시는 노래로 만들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앞으로 계획은 어떨까? “처음엔 일주일에 시 한 편씩 시노래를 만들어 100곡이 되면 끝마치려 했어요. 그런데 시를 볼 때마다 기다렸다는 듯이 운율과 박자를 불러내더군요. 지금은 하루에 한 곡씩 일주일에 다섯 곡을 올리기로 마음을 바꿨습니다. 1차 목표는 시노래 365곡을 만드는 것입니다.”

정혁준 기자 jun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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