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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음악·공연·전시

공들인 ‘프로젝트’ 막판 무산도…조선시대 ‘광화문 직딩’의 일상은?

등록 2022-02-26 11:37수정 2022-02-26 13:13

[한겨레S] 신지은의 옛날 문화재를 보러갔다
‘한양의 상징대로, 육조거리’ 특별전

근무시간·휴가·녹봉·숙직 고민에
일하다 머리 식힐 공간 재현까지
이 시대 일개미들 인류애 자극하는
육조거리 출퇴근하는 관원 이야기
불염정을 표현한 실감형 영상. 서울역사박물관 제공
불염정을 표현한 실감형 영상. 서울역사박물관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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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긋한 오월의 꽃향기가 가슴 깊이 그리워지면 눈 내린 광화문 네거리 이곳에 이렇게 다시 찾아와요.”

가수 이문세가 1988년 발표한 ‘광화문 연가’이다. 서대문에 있는 서울역사박물관에 전시를 보러 갈 때마다 이 노래를 떠올린다. 모두 흔적도 없이 변했다면서도, 변한 곳들 위에 아직 남아 있는 것들을 자꾸만 눈으로 따르는 마음. 도시의 역사를 통해 사람의 이야기를 들여다보는 일이 이와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아서다.

광화문 네거리의 오늘날 이름은 세종로 사거리이다. 여기서 광화문으로 이어지는 대로를 조선시대에는 ‘육조거리’라고 불렸다. 의정부, 육조, 사헌부, 한성부, 중추부 등 국정의 핵심 역할을 하는 중앙관청이 이 길에 자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3월27일까지 열리는 서울역사박물관의 특별전 ‘한양의 상징대로, 육조거리’는 왕이 머무르는 법궁인 경복궁 앞으로 훤하게 통하던 이 길을 조명하는 전시다.

조선판 ‘일의 기쁨과 슬픔’

전시는 한양 건설과 함께 조성된 육조거리의 상징성, 이곳에 위치했던 관청들의 역할과 기능, 육조거리로 출퇴근하던 관원들의 일상으로 구성되어 있다. 전시 2부 중간중간 등장하는 금난수의 <성재일기> 일화들은 장류진의 <일의 기쁨과 슬픔>을 연상케 하는 극사실주의 오피스 드라마다. 특히 1586년 예조에서 일할 적에 종묘대제에 ‘참여할 뻔했던’ 이야기는 그 솔직함에 관람객들의 웃음을 자아낸다.

비록 예비 인원이지만 금난수는 일주일 동안 예행연습에 참여해 식순을 외우며 만반의 준비를 한다. 그랬건만 막판에 참여가 무산된 것이다. 그는 이 일을 일기에 적으며 고생을 던 것이니 차라리 잘됐다고 쿨한 면모를 보이면서도, 준비하는 동안 음악 감상과 음주, 향신료 든 음식까지 참았던 것은 아깝다고 적는다. 될지 안 될지 모르는 일에도 우선 진심을 다하고 보는 자세를 옛사람들에게서 발견하는 즐거움이 여기에 있다.

한편 전시 3부인 ‘육조거리로 출근하는 사람들’에서는 조선 시대 육조거리로 출퇴근하던 관원들의 일상을 조명한다. 조선 시대 관원들은 오전 6시(묘시)쯤 출근해서 저녁 6시쯤(유시) 퇴근했다. 점심시간이나 휴식을 포함해도, 하루 절반을 일터에서 보낸 셈이다. 조선 시대에는 주말조차 없었다는 사실에 경악하다가 한해 휴일이 90일 정도 되었다는 설명을 발견하면 마치 없어진 내 휴일을 찾은 것처럼 다행스러운 마음도 든다. 근무시간과 휴가, 녹봉, 숙직, 모임 등의 시시콜콜한 이야기들은 시대를 뛰어넘어 일개미들의 인류애를 자극한다.

향선추와 불염정

육조에서 일하던 이들이 사용하던 물건들 가운데 특히 눈에 들어오는 것은 ‘향선추’라고 하는 부채 장식이다. ‘관원만 사용할 수 있었다’는 전시 설명 한 줄에 호기심과 상상이 무럭무럭 일어난다. 아무리 말단직이라도 상관없지만 반드시 벼슬아치여야 착용할 수 있는, 정체성을 드러내는 패션 아이템인 셈이다.

조선 시대 부채와 향선추. 서울역사박물관 제공
조선 시대 부채와 향선추. 서울역사박물관 제공

퇴근 시간이 지난 여름날 저녁, 육조거리 뒤편의 흥청한 술집들에서 향선추 단 부채를 연신 부쳐가며 마시고 떠드는 사람들을 상상해본다. 어쩌다 그곳에 처음 와본 사람은 술집에 앉은 사람들을 힐끔 둘러보고는 ‘우와, 과연 육조구나. 부채에 향선추 안 단 사람이 없네’ 하고 감탄하기도 했을지 모른다.

향선추는 국회의원 금배지나 대기업 사원증 목걸이와 비슷하다. 그러나 필수품이 아니라 사람에 따라 쓸 수도 있고 안 쓸 수도 있는 물건이라 더 재미있다. 벼슬하는 양반들이면 다들 향선추를 달고 다녔을까. 아니면 ‘원 쿠션’으로 할 수 있는 걸 하지 않음으로써 점잖음을 두배로 드러내는 사람이 육조거리에도 있었을까.

전시에서 가장 눈에 들어오는 것은 특별 코너로 꾸민 ‘호조의 방’이다. 육조 가운데 호조는 오늘날로 치면 기획재정부와 같이 온 나라의 세금과 재물을 관장하던 곳이다. 세간에서는 호조 사람들을 가리켜 ‘유니’(腴膩, 살찌고 기름졌다)라는 멸칭으로 부르던 시대에, 청사 안 연못가에 세워진 정자 이름이 ‘물들지 말라’는 뜻의 ‘불염정’(不染亭)이었음은 의미심장하게 와닿는다.

호조낭관계회도(세부), 보물, 전·현직 호조 낭관들의 모임을 그린 그림이다.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호조낭관계회도(세부), 보물, 전·현직 호조 낭관들의 모임을 그린 그림이다.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이 정자는 영조대인 1744년 부임한 호조판서가 세운 것인데, 전시에서는 이 불염정을 실감형 영상으로 꾸며놓았다. 정자 기둥과 난간 구조물 너머로 연꽃이 피어 있는 연못 위로 호조 관원들에게 청렴을 권하는 글귀가 떠오른다. 영상 내용은 단순하지만, 전시에서 유난히 마음에 남는 이유는 당시 호조 사람들에게는 저 불염정이 일하다 마음을 비춰볼 수 있는 장소였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다.

새로운 광장엔 새로운 장소를

지리학자 이푸 투안은 1977년 저서 <공간과 장소>에서 공간에 사람들의 경험과 감정이 녹아들면 비로소 장소가 된다고 했다. 사람이 어떤 장소에 품을 수 있는 따뜻한 유대감을 그는 ‘장소애’(場所愛)라고 불렀다. 한나절 일을 하다 보면, 멍하니 있고 싶어지는 순간이 온다. 그럴 때 일하는 사람들은 어디로 향하는가? 어떤 사람들은 휴게실에서, 잠시 문을 열고 나가 찬 바람을 쐬는 옥상에서. 어떤 사람들은 비상계단에서, 걸어 잠근 화장실 문 뒤에서 일하는 동안 억눌려 있던 감정과 온전히 마주한다. 격무에 시달리다 문득 마음을 풀어놓으러 불염정으로 향했을 옛사람들을 떠올리다 보면, 문득 오늘날 우리가 일하는 공간들에는 그런 장소들이 얼마나 있는지 돌아보게 된다. 힘들 때 달려갈 수 있는 장소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든든한 위안이 되는 장소들 말이다.

올해 7월이면 광화문 광장이 재구조화 사업을 마치고 재개장한다. 지난 1월 서울시가 발표한 바로는, 광장 전체 면적이 2배로 넓어지고, 녹지는 기존의 3배 크기로 다종다양한 나무와 초화를 채운다고 한다. 새로 열리는 광화문 광장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수많은 일상들이 오갈 것이다. 그 푸른빛 사이에 홀로 머물 수 있는 자리들도 많았으면 좋겠다. 일에서 나로 돌아가는 시간이 결국 우리를 다시 일로 돌아갈 기운을 내게 해주기 때문이다.

박물관과 미술관의 문화재 전시나 전통문화를 주제로 한 전시를 소개합니다. 우리 문화재를 사회 이슈나 일상과 연결하여 바라보며, 보도자료에는 나오지 않는 관람 포인트를 짚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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