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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음악·공연·전시

전통 불화에 퀴어 감성을 담다

등록 2022-03-02 19:35수정 2022-03-03 02:32

[박그림 개인전 ‘호랑이의 길’]
고려·조선불화 정교한 테크닉에
작가의 게이 정체성 현대적 결합
박그림 작가의 2019년 작 <심호도-낙류>.
박그림 작가의 2019년 작 <심호도-낙류>.
젊은 작가 박그림씨는 배우 유아인의 얼굴을 한 젊은 수호신을 비단에 그렸다. 날개 달린 관을 쓴 그가 날이 세개 달린 삼차창을 들고 서 있고, 그 앞에 창에 찔려 가슴에 피를 흘리는 알몸의 젊은이가 널브러졌다. 가슴의 상처에서 나온 심장을 호랑이가 핥고 있는 모습이다. 그로테스크하면서도 에로틱한 이 도상의 그림이 신비스럽고 명징한 고려 불화의 구도와 채색으로 꾸려졌다는 사실이 호기심과 매혹을 일으킨다. 서울 한남동 버티고개 초입에 있는 스튜디오 콘크리트는 작가의 이런 불화풍 그림들 덕분에 요즘 젊은 애호가와 컬렉터들 사이에서 ‘핫플’로 뜨고 있다. 여기서 열리고 있는 젊은 퀴어 작가 박그림의 개인전 ‘호랑이의 길’(虎路·3월27일까지)이다.

이 전시가 젊은 미술인들과 엠제트(MZ) 애호가들 사이에서 가봐야 할 ‘득템’ 전시로 꼽히는 이유는 두가지다. 첫번째는 도제식 수업으로 실제 고려 불화를 수년 동안 단련한 작가의 높은 회화적 기량이다. 금물과 은물로 갖가지 꽃과 장식 문양을 투명한 옷자락에 가득 채워넣고 화면 뒤에서 은은하게 배경색을 채워넣었다. 앞쪽에는 살짝 덧칠하는 배채법의 미감이 돋보인다. 특히 고려 수월관음도나 조선시대 수호신들 불화인 신중탱을 모사한 듯한 <심호도> 연작 ‘불이’ ‘간택’ ‘낙류’ 등의 작품에서 이런 기법은 빛을 발한다. 원래 불교의 동자형 수호신인 위태천(동진보살)이나 파도 위 암벽에 앉은 수월관음이 나타나야 할 자리에 작가가 꿈꾸는 가상의 꽃미남상을 대체했다. 작가는 이런 이상적인 용모, 바라는 상대에 대한 질시, 열등감, 열망의 감정을 잔혹한 창의 찔림이나 나긋한 눈길의 교환으로 대체하면서 현대미술 특유의 판타지적인 상상력을 불어넣는다.

박그림 작가의 2018년 작 <심호도-간택>.
박그림 작가의 2018년 작 <심호도-간택>.
고려 불화와 조선 초·중기 불화의 모티브를 정교한 테크닉으로 끌어오되 작가가 지닌 게이적 정체성을 유감없이 불어넣는 전시장의 작품들은 이미 수년 동안 작가가 여러 기획전과 개인전에서 시도한 불화의 전통성과 회화의 현대성을 결합시키려는 노력의 일환이다. 이번 전시에서 두 요소는 상당히 밀접하게 결합되면서 생경하면서도 매력적인 분위기를 빚어낸다. 소품으로 나온, 팬시하게 서로를 안은 흑호랑이와 누른 황호랑이의 도상은 다분히 팝적이고 애니메이션 도상에 가까워 고려 불화나 조선 초 불화를 차용한 그의 대작 도상들과는 이질적이고 잘 어울리지 않는다는 느낌도 안겨준다. 꼬리털의 함함한 질감을 드러내어 부각한 미호도는 조선 민화 장식화 호피도를 21세기 젊은 감성 스타일로 변용했다고나 할까. 이런 꼬리가 어떻게 성소수자의 감성과 잇닿는지, 이런 요소들이 어떻게 관객과 좀 더 깊이 교감할 수 있는 도상적 설득력을 얻을 수 있을지는 과제로 남는다.

불화를 현대회화의 범주에서 색다른 리얼리즘적 전망으로 해석하려는 노력은 신중탱이나 감로탱을 현대적 풍자 그림으로 새롭게 재해석한 민중화가 오윤이나 새로운 채색화의 지평을 연 박생광 외엔 거의 이뤄진 바 없다. 이런 맥락에서 여러 한계를 딛고 고려 불화를 현대미술의 경지로 변주하려 한 작가의 시도를 평가할 만하다.

자신들의 심상 세계, 자신들이 그리는 환상 세계, 꿈의 세계, 욕망을 표현하는 데 적절하다면 어떤 이미지도 차용하고 가공할 수 있다는 요즘 세대 작가들의 실용적인 회화관을 보여주는 전시이기도 하다.

글·사진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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