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전 ‘웨이팅 포 더 선’(태양을 기다리며)에 나온 구헌주 작가의 2021년 작 <여가의 의미>. 주말 산행을 나온 중년 남녀들이 산 정상 표석에서 찍은 기념사진을 스프레이로 옮겨 그렸다. 애니메이션 <뽀로로>에 나오는 노래 제목 ‘노는 게 제일 좋아’를 표석 글씨로 슬쩍 집어넣었다.
40·50대 중년 남녀 5명이 주말 산행을 갔다가 찍은 기념사진을 옮긴 그림이 벽면에 그려졌다. 푸르죽죽한 등산복을 입고 산꼭대기 표석 앞에서 몸짓을 취하는데, 표석 글씨가 예사롭지 않다. 산 이름 대신 유아용 애니메이션 <뽀로로>에 나오는 노래 제목 ‘노는 게 제일 좋아’가 큼지막하게 적혀 있지 않은가.
이 그림은 부산에서 그라피티(낙서) 작업을 하는 구헌주 작가가 2021년 스프레이로 칠하며 옮겨 그린 <여가의 의미>다. 지금 팬데믹 시대에 답답한 일상을 살면서 탈출구를 모색하는 청장년 세대 보통 사람들의 내면과 욕망을 재치 있게 뒤틀어 보여준 작품이라 할 수 있는데, 은근히 우스우면서도 한편으로는 강렬한 비애감과 먹먹함이 느껴진다. 실제 살아가는 현실과 놀이와 여가의 꿈 사이에 간극이 크기 때문일 것이다.
서울 상암동 문화비축기지 이야기관(T5)의 1·2층 전시장에서 열리고 있는 이색 기획전 ‘웨이팅 포 더 선’(태양을 기다리며)에는 생존을 위해 무언가를 만들고 생산해 벌이를 하는 행위인 ‘노동’과 고단함을 풀고 인간적 삶을 지속하는 충전 시간으로서의 ‘여가’를 다룬 작품과 생활사 아카이브 100여점이 펼쳐져 있다. 삶과 생존을 함축하는 대표적 용어인 노동과 여가를, 다양한 연령대와 작업 배경을 지닌 작가 12명이 ‘역사와 시대 속에서의 노동’ ‘노동과 일상의 가치’ ‘여가적 삶의 인식’에 대해 각기 자신들의 작업 언어로 이야기하는 얼개다.
노동과 여가란 묵직한 주제를 영상, 애니메이션, 회화, 그라피티, 조형물 등 다양한 시각예술 작품들과 과거 신문 스크랩 등 아카이브 조합 등으로 새롭게 풀었다는 점을 주목할 만하다. 구헌주 작가는 중년 남녀들의 기념사진 패러디 작업 외에도 1980년대 일본 애니메이션 <아키라>의 폭주족 주인공 모습에 지금 배달노동자 이미지를 덧입힌 작업을 통해 21세기 배송 문화를 이야기한다. 홍이현숙 작가는 북한산 마애불의 몸체와 얼굴을 마치 만지듯 속삭이면서 영상을 투영하는 작품을 내보였다.
전시장 모습. 진열장에 고경태 <한겨레> 이노베이션랩 실장의 부친(고 고봉성)이 1959~1992년 신문기사들을 잘라서 붙이고 편집한 스크랩북들이 보인다. 벽면에는 박은태 작가가 노동자들의 몸짓과 주위의 환경을 묘사한 그림과 사진들이 내걸려 있다.
라이프 아카이브 <당신은 나의 태양>에 고경태 <한겨레> 이노베이션랩 실장이 출품한 부친의 신문 스크랩북도 등장한다. 부친 고 고봉성(1935~1993)이 1959~1992년 신문을 오리고 붙여 만든 스크랩북은 과거 보통 아버지들이 시사를 접하면서 여가를 보내고 기억한 방식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고단한 시대를 살았던 아버지들이 여가 생활로 즐겼던 신문 스크랩과 그사이 적은 감상글의 자취들이 드러난다. 당대의 사건과 정치·사회 정세를 담은 객관적인 정보의 편린인 기사 조각과 그사이 일개인의 정념과 감정과 생각들이 함께 배치되면서 정사와는 또 다른 개인의 미시사가 진열장 공간에서 물화되어 빛난다.
옆 벽면에는 현장 노동자들의 몸짓과 주위 환경을 묘사한 박은태 작가의 그림과 사진들이 내걸렸다. 위에서 부감한 듯한 시선으로 건물 건설 현장 노동자들을 포착한 사진들과 맺히고 휘몰아치는 작가의 감정이 드러난 노동자들의 한때 일상을 담은 그림들은 사실적인 묘사를 넘어 초현실과 추상의 심연을 언뜻언뜻 드러낸다.
1층 미디어아트 상영 공간을 모두 차지한 김신일 작가의 영상 작업은 미술관에서 감상하는 관객들이나 그림에 붓질하는 화가, 문을 여는 사람의 움직임을 담은 다섯 채널의 영상을 보여준다. 종이에 꾹꾹 눌러 새기는 압인의 흔적들을 담은 화면 수백장을 연속사진처럼 풀어낸 영상은 예술가들 또한 여느 직장인들처럼 몸을 놀려 생산하고 만들어내는 노동자임을 일러준다.
최윤정 기획자는 노동과 여가를 각기 다른 각도에서 들여다본 여러 작가들의 아카이브와 그림, 사진, 영상들을 도넛 모양의 곡면 공간에 나눠 배치했다. 휘어진 공간 속에서 각기 다른 이미지와 의미를 발산하는 작품들을 통해 노동과 여가에 대한 개념이 사물의 소유에 있지 않고 자기 발견과 존재라는 우리 내적 에너지로 향할 수 있다는 바람을 표출했다는 설명이다. 우리 내적 동력을 은유한 항성인 태양을 기다린다는 뜻의 영문 전시 제목을 지은 까닭이기도 하다. 출품작들을 통해 작가들은 노동과 여가가 온전히 자신의 것이 될 수 있는, 아직 오지 않은 세상에 대한 꿈을 전한다. 5월8일까지.
글·사진 노형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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