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반포 센트럴시티 터미널과 신세계백화점 강남점을 잇는 통로광장의 기둥과 벽면 등에 설치된 미디어아트월. 체코의 장식미술 거장 알폰스 무하의 작품 이미지들이 투사되고 있다.
이제는 백화점과 터미널이 미술관이자 갤러리다!
공공연하게 이런 말을 하는 관객과 미술인들이 생겼다. 서울 서초구 반포동에 있는 신세계백화점 강남점과 이 백화점을 낀 센트럴시티 터미널을 가 보면 격변의 실상을 깨닫게 된다. 터미널과 백화점을 잇는 통로광장의 여덟개 기둥은 거대한 디지털아트의 경연장이 됐다. 다채로운 영상 작품들을 광고와 함께 쏟아내는 거대한 미디어아트월로 변신한 것이다.
대통령 선거 다음날인 10일 오후 터미널 매표소와 통로광장을 찾아갔다. 당장 낯익은 명작이 눈에 잡힐 듯 보인다. 알폰스 무하의 그림이 아닌가. 20세기 초 아르누보 시대를 대표하는 체코 장식미술 거장의 명작들이 혼잡한 터미널 내부를 여기저기서 빛을 내며 맴돈다. 꽃무리 속의 관능적인 여인상들이 화면에 물결치며 터미널 대합실 곳곳에 이미지를 흩뿌린다.
서울 반포 센트럴시티 터미널과 신세계백화점 강남점을 잇는 통로광장의 기둥과 벽면 등에 설치된 미디어아트월. 체코의 장식미술 거장 알폰스 무하의 작품 이미지들이 투사되고 있다.
매표소 위쪽 대형 스크린과 마주 보는 통로 쪽 여덟개의 굵직한 기둥마다 붙은 대형 미디어아트월 화면에서 다양한 포즈의 무하 그림들이 쏟아진다. 곧이어 삼성 갤럭시폰 광고와 화장품, 명품 광고 등이 쉴 새 없이 한참 이어지고, 다시 발달장애인 디자이너와 현대미술 작가들이 환경·난민 문제 등에 대한 성찰을 담은 영상이 흘러나온다.
가로 10m 길이의 대형 전광판과 8개의 미디어아트월에서는 착시현상으로 입체감을 구현하는 ‘애너모픽’ 기법을 적용한 일종의 영상 오브제들이 화려하게 수를 놓고 있다. 기둥이 도열한 통로공간은 현장감 충실한 ‘도심 속 아트갤러리 전시장’이라고 해도 어색하지 않았다.
서울 반포 센트럴시티 터미널과 신세계백화점 강남점을 잇는 통로광장의 기둥과 벽면 등에 설치된 미디어아트월. 체코의 장식미술 거장 알폰스 무하의 작품 이미지들이 투사되고 있다.
통로광장의 광고 기둥은 2019년 4월 대대적인 리뉴얼을 통해 공공장소의 첨단 디지털 상업 상영물 시설(사이니지)로 재탄생한 뒤로 명품 브랜드, 광고 패션쇼, 디지털 화보 등 다채로운 프리미엄 콘텐츠를 선보이는 터미널의 명소로 자리 잡았다. 특히 지난해 8월부터 운영주인 신세계 쪽의 결정으로 디지털아트 콘텐츠를 대거 선보이면서 도심 속 미디어아트 전시 무대로 거듭났다. 센트럴시티 쪽 관계자는 “옥외광고 시장에 디지털 사이니지가 도입된 사례는 적지 않지만, 센트럴시티 미디어아트월은 유동 고객층이 많은 터미널 공간에 걸맞은 디지털 화보, 미디어아트 콘텐츠를 선보이며 친숙하면서도 고급스러운 휴게 공간이 됐다는 평가가 나온다”고 했다.
서울 회현동 신세계 본점 매장 풍경. 이브생로랑 로고가 붙은 매장을 배경으로 알렉스 카츠의 실크스크린 판화 <댄서>와 스테인리스로 만든 김재용 작가의 조형물이 통로벽에 걸려 있다.
센트럴시티 터미널은 단적인 사례일 뿐이다. 최근 국내 대형 백화점들은 매장의 공간 연출과 관련해 미디어아트 같은 영상 작업과 기술력을 활용하는 건 물론이고, 미술관과 화랑의 전시장 분위기를 내는 쪽으로 디스플레이 공간을 고급스럽게 바꾸는 동화 전략을 본격적으로 구사하고 있다. 롯데백화점의 경우 지난해 개장한 경기도 동탄점은 건물 외벽과 저층부 내벽면이 아예 미디어아트 전용 전시관이나 마찬가지다. 1층 정문에서 화면 세개가 움직이는 키네틱 미디어 영상물을 통해 터키 작가 레피크 아나돌의 작품을 상영 중이고, 1층 기둥과 지하 1층 벽면에 미디어아트 작가 그룹 디스트릭트의 생생한 폭포 영상 등을 선보이고 있다.
신세계 강남점 3층의 명품 매장에서 패션 상품들과 나란히 같은 출품작처럼 전시된 알렉스 카츠의 판화.
신세계 강남점 3층의 명품 매장에서 패션 상품들과 나란히 같은 출품작처럼 전시된 데이비드 호크니의 디지털사진 이미지 작품.
매장을 갤러리처럼 변신시키는 경쟁도 본격화했다. 신세계의 경우 2007년부터 회현동 본점에서는 국내외 주요 작가들의 작품을 구관 통로에 전시해왔으나, 2020년 말부터 강남점 2, 3층의 명품 매장 통로와 매장 주변도 ‘아트 스페이스’란 이름 아래 갤러리 공간처럼 바꾸었다. 미국 작가 알렉스 카츠나 영국 작가 데이비드 호크니 같은 거장과 국내 중견 소장 화가들의 작품들을 매장의 의류·패션 명품들과 마치 같은 출품작인 것처럼 비슷한 색조의 공간에서 바꿔 걸고 있다. 3층 한쪽 통로와 2층 브이아이피(VIP) 휴게실은 갤러리 전용 전시 공간으로 만들어 전문 딜러 등을 상주시키면서 오가는 손님들의 주문과 구매 상담을 받고 있다. 다음달 11일까지 회현동 본관에서 작은 아트페어까지 연다.
롯데백화점이 서울 잠실 롯데몰에 차린 신진 수집가를 위한 작가 판매 전 ‘슬기로운 수집생활’ 현장. 관객들이 소품을 살피고 있다.
롯데백화점도 적극적이다. 지난해부터 아트갤러리팀을 신설해 본관 매장 등에 명품과 함께 어울릴 만한 전시를 기획하는 등의 마케팅 전략을 펼치고 있는데, 잠실 롯데몰 1층에 ‘슬기로운 수집 생활’이라는 작가 소품 판매전을 차려 관객에게 손짓하고 있다. 지난해 내부 공간을 확 틔운 대형 설치 공간 콘셉트로 개장한 여의도 ‘더현대 서울’ 백화점도 개별 상품을 돋보이게 하면서 선전하는 매장이 아니라 고객의 시각적 욕구에 맞춘 문화 공간 성격을 강조하고 있다. 상부층을 거대한 공중정원과 대형 설치작업 공간 얼개로 선보여 눈길을 끌었다.
‘고대 한국의 외래계 문물’전이 열리고 있는 국립경주박물관 기획전시관 들머리 모습. 어둡고 경직된 기존 박물관 전시의 관행을 벗어나 호텔 로비나 카페처럼 밝은 조명을 주로 쓰고 푹신한 소파 등을 비치했다. 편안한 휴식 공간 같은 분위기를 강조한 박물관 전시의 파격이다.
박물관은 백화점·호텔처럼 연출
쇼윈도·고급조명·안락의자 파격
“대중 앞으로” 공간혁신 긍정 평가
반면 고고한 문화재의 전당을 표방했던 박물관은 백화점이나 호텔 분위기로 공간 연출의 파격을 꾀하고 있다. 지난 연말부터 문화재 학계와 애호가들 사이에서 화제를 낳고 있는 경주박물관의 기획전 ‘고대 한국의 외래문물’전이 단적인 일례다. 경주 월성동 고분서 나온 페르시아풍 보검과 로만 글라스, 목걸이 등 익히 알려진 고대 실크로드 외래계 유물들을 잘 꿴 대중용 전시인데, 밝은 백화점식 조명에 쇼윈도식 진열장, 곳곳에 놓은 고급 조명등과 안락의자 등 마치 호텔과 백화점을 거니는 듯한 감흥을 주는 전시 얼개로 파격을 시도했다. 이미 2020년에 신라문화역사관 상설관 전시장도 호텔 로비 같은 고급스러운 장식재와 전시품의 배치 변화를 시도한 바 있다. 역시 지난해 선보인 국립광주박물관의 상설역사관, 아시아 도자관이나 호암미술관의 ‘야금’전 또한 쇼윈도식의 밀착형 진열장과 떠 있는 듯한 큐레이팅으로 호평을 받았다.
‘고대 한국의 외래계 문물’전이 열리고 있는 국립경주박물관 기획전시관 들머리 모습. 어둡고 경직된 기존 박물관 전시의 관행을 벗어나 호텔 로비나 카페처럼 밝은 조명을 주로 쓰고 푹신한 소파 등을 비치했다. 편안한 휴식 공간 같은 분위기를 강조한 박물관 전시의 파격이다.
공공미술관이나 영화관 등 관객을 특정 시간 동안 가두거나 유리시키는 기존 문화 공간들은 격변하는 디지털 환경과 젊은 세대 감성에 맞춰 유연한 공간성을 확보하지 못하는 상황이다. 최근 기획 틀거지를 전면적으로 바꾸고 ‘대중 앞으로’를 외치는 백화점과 박물관의 변화는 관객 친화적인 공간 혁신 전략이란 측면에서 일면 긍정적이라는 평가가 나온다. 다만, 미디어아트 동영상 등 일련의 디지털화 전략이 지나친 과잉으로 흘러 유물이나 명작 실물의 이미지를 덮어버리거나 전시 본질을 왜곡시키는 역효과를 부른다는 지적은 되새겨볼 필요가 있다.
글·사진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