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안공간 웨스에 차린 요절 조각가 전국광의 작품 전시 현장. 청동, 석고, 알루미늄 등 여러 재질의 크고 작은 덩어리들이 표면의 질감을 드러내며 배열된 얼개를 띤다.
그의 전시에 가면 덩어리들한테서 위안을 받게 된다. 표면 곳곳이 움푹움푹 들어간 알루미늄판과 굵게 주름이 잡힌 구리 육면체, 이어 붙여 공중에 대롱대롱 매달아놓은 나뭇조각 뭉치들….
1970~80년대 20여년간 각양각색의 덩어리 조형물들을 만들고 탐구하다 요절한 현대조각가 전국광(1945~1990)의 작품은 특이한 힐링 경험을 선사한다. 고인이 빚어낸 덩어리들이 오롯이 ‘표면’ 이미지 자체로 자신의 내면을 이야기하고, 작가·관객들의 내면까지 건드린다. 흔히 조각가나 건축가들이 ‘매스’라고 부르는 덩어리들이다. 쌓이거나 붙이거나 하면서 덩어리 표면에 필연적으로 형성되는 질감과 형태가 안겨주는 깊고 오묘하고 복잡한 감정 혹은 생각을 즐기는 것이 감상의 비결이다.
전국광 작품들이 재조명 자리에 나왔다. 작업을 본격화한 1970년대 초중반부터 세상을 떠나기 직전인 1980년대 말까지 고인의 조형물들이 주된 대상인 회고전이 차려졌다. 서울 강남의 대안적 전시공간 하이트컬렉션에서 활동 중인 소장 큐레이터 이성휘씨가 고인의 딸인 사진작가 전명은씨와 협업해 만든 ‘전국광, 모더니스트’전이다. 전시장은 큐레이터들이 공동운영하는 서울 성북구 삼선동 대안공간 ‘웨스’다.
33㎡도 안 되는 전시장에는 표면에 요철과 질감이 나타나면서 허공에 형태를 그리는 크고 작은 작품들이 검게 칠한 대형 나무 테이블을 중심으로 마치 설치작품처럼 옹기종기 배열돼 있다. 10점 넘는 석고, 알루미늄, 대리석, 브론즈 재질의 각양각색 덩어리들이 테이블 위에 놓였고, 주변 공간과 벽에도 기하학적 형상의 플라스틱, 철사, 나무 조형물들이 매달리거나 붙어 있다. 대부분 ‘쌓다’를 뜻하는 적(積)이란 연작 제목이 붙었고, 벽면에 붙은 작업구상을 연필로 스케치한 소품들에는 ‘매스의 내면’이란 제목이 달렸다. 액자 모양 나무판 위에 돌 모양 구리 덩어리 수십개를 세모꼴 탑 모양으로 붙인 <자유―일백팔개의 치성탑>이란 작고 직전의 작품도 보인다.
전국광은 형태, 구조, 재료를 탐구하는 모더니즘 추상 조각의 한국적 특징과 맥락을 만들어냈다는 평가를 받는다. 모든 조각이 갖는 속성인 덩어리짐을 작업 화두로 삼았던 그는 ‘적’ 연작을 통해 쌓는 조형물을 만드는 행위가 특정 재질의 조형물마다 어떤 양상으로 표면에 나타나는지 탐구했다. 관심은 자연스럽게 덩어리 안에 자리 잡은 구조로 확산됐는데, 인간의 몸과도 연결되는 유기적 이미지를 추구하는 쪽으로 작업 흐름이 이어졌다. 산업 재료를 쓰면서 몰개성적이고 즉물적인 이미지를 냉혹하게 담아낸 70~80년대 서구의 미니멀 조각과는 차별점을 지닌다.
이성휘 기획자는 인문학 거장 에드워드 사이드의 유작 저술 <말년의 양식에 관하여>에서 영감을 받아 ‘말년성’이란 코드로 전국광 조각을 재해석한다. 80년대 중반까지 매스의 내면에 집중하다가 죽음을 앞둔 80년대 후반부터 분열과 균열, 자기모순을 작품에 드러냈다고 기획자는 전시 글에서 분석한다. ‘선은 가능한가’란 글귀가 방사형의 조형물 드로잉 옆에 적힌 <매스의 내면> 연작 스케치는 일종의 말년 화두처럼 다가오는데, 투명 아크릴 구조물의 단면을 허공에 매달거나 비닐테이프를 거칠게 붙여 평면을 구성한 <매스의 내면> 연작들이 이런 화두를 담은 작품들로 비친다. 몸을 움직이며 감각을 구동시켜 얻는 사물의 표면 자체와 질감의 촉각성이 생생하게 와닿는 이 전시의 특징은 균일하고 반듯한 평면만 보여주는 현재 디지털 가상 시각문화의 획일성을 거꾸로 절감하게도 한다. 4월8일까지.
글·사진 노형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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