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뜨거운 싱어즈> 장면 갈무리. 배우 김영옥이 ‘천 개의 바람이 되어’를 부르고 있다.
흰머리 노배우가 마이크를 만지작만지작했다. 긴장한 듯 입술을 살짝 깨물기도 했다. 피아노 선율이 잔잔히 흐르자 노배우는 또박또박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나의 사진 앞에서 울지 마요/ 나는 그곳에 없어요/ 나는 잠들어 있지 않아요/ 제발 날 위해 울지 말아요”
무대에 오른 84살 맏언니 배우 김영옥은 마이크를 손에 꼭 쥐고 살짝살짝 떨리는 목소리로 임형주의 ‘천 개의 바람이 되어’를 불렀다. 노랫말은 ‘울지 말라’는데, 노래를 듣는 출연진은 하나같이 눈시울이 젖었다. 떠나간 이는 바람이 되어 당신 곁에 있으니 울지 말라는 가사는 노배우의 삶을 통해 남겨진 이들에게 위로의 바람으로 다가왔다.
노래를 마친 김영옥은 노랫말에 나오는 ‘바람’이 안쓰러웠다고 했다. “만약 내세가 있다면 그저 사라지는 것보다 바람이 되어도 좋겠다”고 했다. 노래를 부르면서 생각난 사람으로 “먼저 간 안타까운 가족”을 꼽을 때는 목이 메어 말을 잇지 못했다.
<뜨거운 싱어즈> 장면 갈무리. 배우 나문희가 노래하고 있다.
상대를 뛰어넘어서야 올라갈 수 있는 서바이벌 음악프로그램이 쏟아져 나오는 가운데, 이들과는 다른 음악 예능프로그램 <뜨거운 씽어즈>(JTBC)와 <아기싱어>(KBS2)가 잔잔한 감동과 웃음을 선사하고 있다.
이들 프로그램 출연자들은 노래나 춤, 화려한 외모로 다가서지 않는다. 인생을 실은 목소리로 눈시울을 젖게 하고, 순수함을 담은 목소리로 웃음을 주며 보는 이의 마음을 치유한다. 두 프로그램이 경쟁이 아닌 화합에 초점을 맞춘 점도 눈길을 끈다. 참가자 평가와 탈락, 그 과정에서 벌어지는 신경전을 ‘악마의 편집’으로 자극적으로 보여준 기존 서바이벌 예능과는 결이 다르다.
지난달 14일 처음 방송한 <뜨거운 씽어즈>는 김영옥을 비롯해 나문희·이병준·김광규·윤유선·장현성 등 15명이 서로 화합하며 합창단을 꾸려 무대에 서는 모습을 그린다. 평균 나이 56.3살인 이들은 합창단을 만들어가는 과정에서 노래와 함께 인생 이야기를 담담하게 털어놓는다. 음악감독은 오디션프로그램에 자주 나오는 심사위원이 아니다. 뮤지컬 쪽에서 손꼽히는 김문정 음악감독과 독보적인 음색 장인으로 통하는 밴드 잔나비의 최정훈이 맡았다.
<뜨거운 싱어즈> 장면 갈무리. 배우 우현이 박진영의 ‘날 떠나지 마’를 부르고 있다.
첫 방송에서 첫 도전자로 나선 나문희는 조덕배의 ‘나의 옛날이야기’를 불렀다. 배우가 연기하듯 노래에 진심과 감정을 실어 전달한 나문희의 열창에 출연자들은 눈물을 흘렸다. 김문정 감독은 “지금 하신 노래가 선생님의 이야기처럼 들렸고, 어느 순간 나의 이야기처럼 들려서 눈물을 참았다”고 했다. 오랜 무명 시절을 겪은 배우 이서환이 힘든 시기를 함께 버텨준 아내를 떠올리며 정인·윤종신의 듀엣곡 ‘오르막길’을 불러 감동을 끌어냈다. 배우 우현은 하얀 가죽재킷을 입고 무대에 올라 박진영의 ‘날 떠나지 마’를 격렬한 댄스까지 소화하며 열창했다.
연출을 맡은 신영광 피디는 제작발표회에서 “우리 합창단은 균등한 실력을 갖춘 다른 합창단과 달리 노래를 잘하는 사람도 있고 조금 못하는 사람도 있다”며 “서바이벌과 경연이 난무하는 방송계에서 합창프로그램을 해보면 어떨까 했다. 노래뿐만 아니라 인생도 합쳐지면 유쾌한 울림을 줄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지난달 12일 첫 방송을 탄 <아기싱어>는 올해 5월5일 100주년이 되는 ‘어린이날’을 맞아 국민 동요를 선보이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다. 동요보다 가요나 팝송이 접근하기 쉬워진 시대에 아이들이 공감할 수 있는 노래를 만든다는 취지로 기획된 프로그램이다.
유치원 콘셉트로 김숙과 문세윤이 원장 선생님, 정재형·장윤주·이석훈·기리보이·이무진이 선생님 겸 프로듀서를 맡았다. 이들은 전국에서 모인 어린이 14명과 함께 동요를 만들어나간다. 동요 제작에 함께할 아이들은 오디션으로 선발했다. 450여명의 지원자가 몰렸다고 한다.
<아기싱어>는 아이들을 선발하는 오디션에 초점을 맞추기보다 동요 만들기에 주목한다. 프로그램 시작 전에 이미 출연할 아이들을 모두 선발했고, 이들은 모두 한 팀이다.
한국인 엄마와 캐나다-멕시코 출신의 아빠 사이에서 태어난 다문화가정의 다니엘라는 국악 동요를 불러 반전 매력을 뽐냈다. “아빠는 집에서 바지를 벗고 있는다”란 솔직 엉뚱한 이야기로 웃음을 불러왔다. 김준목군은 방탄소년단(BTS)의 ‘불타오르네’를 화려한 댄스와 함께 펼치며 뛰어난 리듬감과 남다른 박자 감각을 보여줬다. 4살 꼬마 이시안양은 앙증맞은 율동을 곁들여 ‘섬집 아기’를 완벽하게 소화해내며 귀여움을 받았다.
순수하고 해맑은 아이들 모습에 “치명적 매력의 전국 귀요미 어린이들” “꾸미지 않고 순수해서 더 좋다” “천사의 목소리를 듣고 있는 거 같다” 등 ‘엄빠 미소’ 가득한 시청자 반응이 이어졌다.
프로그램 연출을 맡은 박지은 피디는 제작발표회에서 “<아기싱어>를 오디션으로 생각하는 분이 많은데, 경쟁을 지향하고 탈락시키는 프로그램이 아니다”라며 “노래 실력만으로 줄 세우기를 했다기보다 2022년 대한민국에 사는 대표 어린이를 정한 것”이라고 했다.
세대를 아우른 두 프로그램은 ‘매운 맛’보단 ‘슴슴한 맛’에 가깝다. 그런데도 사회관계망서비스(SNS)와 온라인 커뮤니티에선 “힐링된다” “뭉클하다”는 ‘핫’한 반응이 이어지고 있다. <뜨거운 씽어즈>는 3~4%대(닐슨코리아, 유료가구 기준), <아기싱어>는 2~3%대(닐슨코리아) 시청률을 보인다. 각각 월요일 밤 9시, 토요일 오후 5시에 편성된 점을 고려하면 순항 중이라 할 수 있다.
정덕현 대중문화평론가는 “두 프로그램은 경쟁하고 탈락하는 오디션프로그램에서 벗어나 출연자들이 화합하고 뭔가를 만들어나가는 데 초점을 둔 점이 차별화 포인트”라며 “<뜨거운 씽어즈>는 출연 배우들이 노래를 음정 박자 차원에서 전달하는 게 아니라 가사와 스토리를 녹여 들려주기에 감동을 주고, <아기싱어>는 순수하고 때 묻지 않은 아이의 노래 자체가 힐링을 주기에 인기를 끌고 있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정혁준 기자
june@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