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골을 보며 수행하는‘무상관’(無常觀)과 경계의 대상으로 파충류를 새긴 네번째 조각토굴. 살림출판사 제공
지난 4월10일 강화도 전등사 ‘관음전 점안법회’에 참석한 강대철(오른쪽) 조각가가 부인 김현숙(왼쪽)씨와 함께했다. 그가 은둔 17년 만에 만든 ‘관세음보살상’을 처음 공개한 자리다. 김경애 기자
지난 10일 강화도 전등사에서 ‘관음전 점안법회’가 열렸다. 일반적인 불사의 하나일 수 있는 이날 법회에서 유독 눈길을 끈 것은 반가사유상을 닮은 ‘관세음보살상’의 독특한 형식만큼이나 남다른 조각가의 사연이었다.
“한마디로 경악, 그 자체였다. ‘한국 조각의 간판’이었다가 홀연 미술계에서 사라졌던 작가가 전남 장흥에서 토굴을 파고 수행중이라는 소문을 듣고 지난해 찾아갔다가 깜짝 놀랐다. 무려 7개의 토굴 속에 놀라운 조각품들이 새겨져 있었다. 예수가 석관에 누위있는 미륵불을 바라보고 있는 토굴입구 중앙홀의 조각부터 압권이었다.”
이번 관음전 불사의 자문위원을 맡은 윤범모 국립현대미술관장이 ‘한국 최초의 조각토굴 미술관’을 발견한 순간이자 관세음보살상의 조각 적임자를 찾아낸 순간이었다.
“처음엔 그저 십여평 정도 토굴집을 마련해서 인연 닿은 지인들과 차 한잔 나누며 마음을 어울리고자 했어요. 그런데 그 산기슭에만 있는 특이한 지질을 만나 꼬박 6년간 혼자 곡괭이질로 토굴을 파고 미친듯이 조각을 하게 됐죠. 한마디로 운명인 거죠.”
무려 17년 만에 작품과 함께 사진집과 시집을 낸 강대철(75) 조각가에게 ‘조각토굴 탄생기’를 들어봤다.
지난 4월10일 강화도 전등사 ‘관음전 점안법회’가 열렸다. 왼쪽부터 회주 장윤 스님, 후불탱화를 그린 이수예 작가, 강대철 조각가, 주지 여암 스님이 현판(성파 종정의 글씨)을 배경으로 함께했다. 김경애 기자
홍대 미대 나와 1978년 화려한 주목
‘한국 조각계 간판’ 27년 왕성 활동
2005년 성철 스님 기념물 이후 ‘은둔’
전등사 ‘관음상’ 맡아 17년만에 복귀
전남 장흥 사자산에 토굴 7개 완성
“6년간 홀로 곡괭이질하며 ‘나’ 찾아”
강대철 조각가는 2015년 전남 장흥 사자산 기슭에서 특이한 지질을 발견하고 곡괭이질을 시작해 6년간 7개의 조각토굴을 짓게 됐다. 살림출판사 제공
천정 높이 5미터에 지름 1미터의 하늘 창을 낸 토굴 입구의 중앙홀. 살림출판사 제공
강대철 조각가가 맨처음 토굴 입구 벽에 새겨 만든 ‘예수와 미륵불’. 전체 조각토굴의 주제가 되었다. 살림출판사 제공
“1995년 해인사 백련암의 성철 큰스님 존상에 이어 2005년
경남 산청 겁외사의 성철 스님
입상이 마지막 공식 작업이었죠. 2002년 전시를 끝으로 조용한 수행처를 찾아 전국을 돌아다니다 전남 장흥 사자산 기슭에 정착한 것도 그해였어요. 어느 스님이 거처했던 작은 움막집을 구해 수리해서 지냈어요. 그런데 2015년께 토굴집을 하나 만들려고 근처를 파보니 마사토와 황토진흙이 섞여 있기도 하고 알 수 없는 몇가지 종류의 점력 있는 흙들이 버무려져 압축된 지질이었어요. 조형물을 만들 수 있을 정도로 단단했고 질감도 느낌이 좋았어요. 몸 속에서 꿈틀 조각 본능의 습기가 발동하더군요.”
그는 그때부터 날만 밝으면 굴 속으로 달려가 해질 때까지 하루 10시간씩 작업해 모두 7개의 토굴을 팠다. 굴 길이를 합치면 100m가 넘는단다. 저마다 굴 속에는 부조 중심으로 50여 가지 조각품이 들어찼다.
“어린시절엔 어머니를 따라 독실한 기독교인이었어요. 어른이 되면서 종교에 대한 근원적 질문과 함께 ‘진짜 예수’를 찾고자 정신적 방황을 했어요. 대학시절 대형 불상 조각을 의뢰받은 교수 밑에서 조수로 일하면서 불교와 인연이 시작됐죠. 훗날 내 삶의 진정한 의미를 찾기 위한 방편으로 불교를 선택하게 될 줄은 그땐 몰랐어요.”
경기도 이천에서 태어난 강 작가는 농고를 나와 베트남전에 참전한 뒤 뒤늦게 홍익대 미술대학에서 조각을 전공했다. 1978년 ‘국전’ 문공부 장관상과 ‘제1회 중앙미술 대상’을 수상했다. 특히 대상 수상작
‘생명질’을 비롯해 군홧발에 짓이겨진 ‘K씨 농장의 호박’ 연작 등은 구상 위주의 조각계에 신선한 바람을 일으켰다. 1998년 페루 리마 국제 조각심포지엄에서 최고작가상을 받기도 했다. 27년에 걸쳐 100여 회의 국내외 전시를 했다.
그렇게 왕성하게 활동했던 그가 환갑 즈음 선불교에 입문해 ‘구도의 길’을 걷게된 연유는 무엇일까. 최근 동시에 펴낸 토굴 수행 사진집 <강대철 조각토굴>(사진 유성훈 작가)과 시화집 <어느 날 문득>(살림출판사)에서 그는 나름의 답을 내놓고 있다. 그 가운데 ‘장시-땅굴을 파며 노래하다’는 그의 일생을 정리해놓은 듯하다.
‘전쟁이 휩쓸고 지나간 자리에/ 지아비를 잃고 어린 사남매 끌어안고 황망해 하던 어머니/ 예수를 만나 살아갈 의미를 찾아/ 모든 일은 신의 뜻이 있음을 믿고 범사에 감사했었네// 세월이 흘러 내 의식이 훌쩍 커버린 어는 날/ 교회 안에는 진짜 예수는 없고/ 교리와 떠도는 말들만 있다는 걸 알게 됐지./ 철이 든 나는 뒤늦게 역사 속에서 사라진 진짜 예수를 찾아 헤메였는데/ 그 예수가 바로 부처였구나’, ‘자기 인생 실험한다고 목숨 걸고 월남 전쟁판 뛰어들어/ 다시 한번 홀어미 가슴에 대못을 박아 놓았소/ 뒤늦게 대학을 다니며 예술가의 길을 가며 진리를 찾겠다더니/ 세상 사람 보기에 어엿한 예술가가 되었는데/ 그길도 아니라며 방황을 하면서 온갖 잡질 서슴치 않았으니’ ‘인생 조용히 마무리 하겠다고 찾아온 것이/ 남도땅 끝자락 사자산 기슭 참새미 터에 둥지 틀고 않았네요’ ‘흙을 통해 드러난 예수부처가 나를 부추긴다/뚫어라! 뚫어라!’
“반복되는 곡괭이질 덕분에 어깨 위에 춤사위가 얹어졌는지 앉아서 쉴 때도 어깨가 들썩인다. 신명 난 이가 흥에 겨워하듯 들썩인다. 땅을 파는 곡괭이질이 나를 찾아가는 여행길임을 그 누가 알았겠는가. 내가 무엇이며 나는 누구인지를 모른 채 살아온 세월, 이제야 곡괭이와 더불어 대자유인이었던 나를 찾아가네.”
‘생각, 감정, 오감이 만드는 에고’를 주제로 명상홀을 만든 첫번째 조각토굴. 살림출판사 제공
강 작가는 “굴을 파고 조각을 새기는 작업이 그대로 기도의 과정이었다. 하지만 특정 종교의 이미지를 구현하려던 게 아니라, 불교를 매개로 ‘대자유인으로서의 나’, ‘진정한 나’를 찾아가는 탐색의 도정이 예술의 길과 자연스럽게 맞닿았다”고 설명했다.
‘비로소 지혜의 문이 열리면/ 우리는 대자유인이 되어 열반의 길로 들어선다네./ 보시의 굴/ 지계의 굴/ 인욕의 굴/ 정진의 굴/ 선정의 굴/ 반야의 굴/ 여섯 개의 굴을 뚫고 그 굴 속에 조용히 앉아/ 바라밀의 여섯 바퀴 굴려가며 지혜의 문으로 다가가세/ 열반의 문으로 들어가 보세’, ‘중생이 있으므로 부처가 있으니/ 삼라만상 모두가 부처의 씨알이라/ 모든 중생 어울려 살아가는 모습 화엄의 세계로구나/ 그 모습 수백개의 불상으로 새겨 넣으니/ 곡괭이질 멈출 때 되어/ 들숨 날숨 바라보며 본래 있던 자리에 곡괭이 내려놓는다/ 있는 자리가 완전하구나’
그는 조만간 에세이집 <외로운 사람들>(가제·살림출판사)도 펴내는 데 이어, <세상의 그리운 것들>(1997년), 장편소설 <끌>(1981년)과 <그대 몸짓 속의 그대>(1994년) 등 예전 책들도 차례로 재출간해 〈강대철 전집〉(전 6종)으로 묶어낼 예정이다.
지난 17년간 함께 수행해온 부인(김현숙)의 묵묵한 내조가 없었으면 불가능한 작업이었다고 강조한 그는 앞으로 2년쯤 조각토굴을 완전히 마무리 지은 뒤 인연 닿는 이들과 함께 수행공간으로만 활용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김경애 기자
ccandori@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