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서울 ‘창성동실험실’에서 각자의 옛 작업들을 한옥 내부 공간에 배치한 독특한 틀거지의 2인전을 꾸린 권순철 작가(왼쪽)와 이강소 작가가 전시장에 나란히 섰다. 지난 3일 개막 행사 때의 모습이다.
“봄비에 젖어서 길을 걸으면/ 나 혼자 쓸쓸히 빗방울 소리에…”
바로 이 맛인가. 1970년 발표된 박인수 히트곡 ‘봄비’의 사이키델릭한 육성 가락과 함께 와닿은 한국 현대미술의 깊숙한 맛이 혀 아닌 눈동자에 착 감겼다.
서울 서촌의 묵은 한옥 전시장인 ‘창성동 실험실’에서 낭랑한 노랫소리와 함께 만난 원로미술가 이강소(79), 권순철(78) 작가의 2인전 ‘가슴이 두근두근’(29일까지)은 이달 초 개막한 뒤 화단에서 단연 화제의 전시가 됐다. 그만큼 청년 작가들을 방불케 하는 구작들의 팔팔한 활력과 상상력이 특출했다. 수년 전 중국 대륙의 이름 모를 민가와 골목길을 방황하면서 찍은 이강소 작가의 사진 패널판들이 한옥 공간 내벽을 덮은 얼개부터 예사롭지 않다. 창틀과 문지방, 담벼락, 골목길 등의 낯선 풍경이 크게 확대되어 내걸리자 마치 그 속을 꿈꾸며 걷는 듯한 몽유적 풍경을 안겼다. 그 옆 공간엔 평생 인간 군상의 얼굴과 내면의 묘사에 천착해온 권 작가의 색다른 오브제 화폭이 여러점 내걸렸다. 두꺼운 질감의 마티에르 색층으로 회오리치는 인간 내면을 그려낸 평면 회화 위에 볼트·너트와 장갑들을 휘휘 던지듯 붙인 1990년대 작업들과 1969년 초기작 <속세> 등이 이 작가의 사진과 독특한 조화를 이루었다. 반세기를 넘긴 서촌 근대 한옥에서 천장의 대들보와 서까래를 드러낸 채 그 아래 구획된 두 작가의 전시장 여러 곳들을 관객들은 흥미로운 표정으로 들락날락거렸다. 부유하듯 중국 민가의 안팎 여기저기를 찍은 이 작가의 눈길과 사람들의 겉과 속을 수십여년 투시하며 뜯어본 권 작가의 눈길이 전시장 속 사진 패널과 그림 위를 맴돌며 어우러진 광경은 관객들을 배우로 끌어들인 무대의 배경처럼 비쳤다. 이 작가는 “50여년 전 서울대 미대 선후배 재학생으로 서촌 누하동 작업실에서 함께 술 마시고 먹고 자며 작업했던 청년 시절의 기백을 살리자고 의기투합해 내놓은 전시”라고 털어놨다. 지난해 권 작가가 창성동 실험실 한옥에서 전시를 치른 것을 본 이강소 작가가 청년 작가 시절의 기운을 되살리고 싶은 강한 열망을 느꼈고 화단에 내놓는 작품들과는 전혀 다른 자신들의 내밀한 작업들로 협업전을 차렸다고 했다.
미술시장이 달아오른 올해 봄 미술판 트렌드 중 하나는 시장 흐름에 구애받지 않는 원로 중견 작가들의 소신 전시들이 활기를 띤다는 점이다. 창성동에 차린 70대 이강소·권순철 작가 전시를 비롯해 이명복, 김준권, 안창홍, 김을, 강운, 이형구 등 원로 중견작가들이 기존 작업 흐름이나 형식을 벗어난 파격을 시도하거나 작업 양상을 크게 변모시킨 근작 전시들을 최근 두달 사이 잇따라 내놓고 있다. 엠제트(MZ)세대 청년작가층과 80~90대 단색조 원로화가들이 양분한 시장 트렌드와 별개로 자기만의 독창적인 색깔과 깊은 작업세계를 지닌 중견작가들의 새로운 에너지를 엿볼 수 있다.
부산시립미술관 2층에 펼친 이형구 작가의 설치작품 <엑스 베리에이션>(X Variation, 2021). 작가가 지속해온 몸에 대한 조형적 탐구를 3차원 공간에 펼쳐놓은 역작으로 평가된다.
특히 부산시립미술관에 지난달부터 마련된 ‘한국현대미술작가 조명―이형구’전(8월7일까지)은 미술판에서 작가를 바라보는 새로운 패러다임을 만들었다는 평가가 나온다. 인기 애니메이션에 나온 동물 이미지의 뼈다귀 작업인 ‘호모 아니마투스’ 연작으로만 인식됐던 이형구 작가에 대한 미술판의 기존 인식을 깨는 새 틀거지의 재조명 작업이 단연 돋보였다. 전시는 작가의 미국 유학 시절부터 동양인의 왜소한 몸에 대한 트라우마가 작용해 몸의 일부를 확대 과장하는 돋보기 작업과 가상의 애니메이션 캐릭터의 몸을 조작하거나 사람의 몸 자체를 다각도로 분석하고 변용시키는 작업들로 이어졌음을 연대기적인 작업들의 전개 과정을 통해 보여주었다. 특히 전시장에 한번도 모이지 않았던 인간 두상의 해체 변용 작업을 보여주는 연작들을 집대성해 배치하고, 인간 장기 조각들을 층고가 높은 큰 전시장에 소우주처럼 내걸고 펼친 대규모 설치작업 <엑스 베리에이션>은 전시의 백미라고 할 수 있다.
서울 은평구 진관동 사비나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는 ‘안창홍-유령패션’전의 전시장 일부 모습. 팬데믹 상황에서 제작한 근작인 대형 마스크 연작들과 몸체가 없이 빈 옷이 활보하는 ‘유령패션’ 조형물이 보인다.
전남도립미술관에서 비슷한 시기 막을 올린 강운 작가의 개인전 또한 비슷한 양상을 드러낸다. 하늘과 구름의 정밀하고 다채로운 재현 작업으로 화단에 익히 알려진 작가가 내면의 세계를 포괄한 추상적 색면회화로 근래 큰 폭의 변화를 모색하게 된 과정을 설치작품 얼개의 독특한 형식을 통해 부각시켜 보여주고 있다. 서울 진관동 사비나미술관에서 ‘유령패션’ 전이란 독특한 제목의 개인전을 차린 중견작가 안창홍씨의 신작들도 파격적인 표현 형식의 변화가 감지된다. 팬데믹 상황에서 제작한 근작인 대형 마스크 연작들과 함께 몸체가 없이 빈 옷이 활보하는 ‘유령패션’ 조형물과 평면회화 등은 태블릿피시에 전자 펜을 끄적여 기본적인 작품 틀을 만든 것들이다. 타인과 격리된 소통단절의 시대 상황을 작가 특유의 악마적 상상력으로 형상화한 결과물이라고 할 수 있다.
새로운 조형 언어를 찾아 갱신과 파격의 모습을 보여주는 중견작가들의 분투는 미술시장 현 상황에서 고무적인 징후라고 할 수 있다. 최근 엠제트세대의 집중 투자 속에 새로운 상품으로 떠오른 청년 작가들의 작품들이 기법이나 제작 방식 등에서 프로 작가로서의 역량과 자격을 갖췄느냐는 논란이 이는 상황에서 미술 콘텐츠의 새로운 활력소가 될 수 있는 까닭이다.
글·사진 노형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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