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도뮤지엄 2층 전시장에 펼쳐진 스위스 출신 작가 우고 론디노네의 2016년 작 설치작품 <고독한 단어들>의 전시 풍경. 노형석 기자
웃지 않는 피에로(광대)들이 제주 한라산 기슭 전시장에 나타났다.
빨간 코에 빵떡모자, 줄무늬·점무늬·금박·색동 등을 수놓은 옷차림새는 분명히 피에로다. 그런데 행동은 광대 같지 않다. 관객이 와도 익살 없이 지치고 풀죽은 표정으로 주저앉거나 엎드려 있다. 자세히 살펴보니 얼굴 곳곳에 상처가 났고, 모두 눈을 감고 있다. 애잔하고 서글픈 느낌에 피에로 옆에 같은 ‘포즈’로 앉거나 엎드려 보는 순간, 선뜻 스치는 생각. ‘아, 이 피에로들은 혹시 지금 우리 모습이 아닐까.’
제주 서귀포시 안덕면 중산간 언덕에 자리한 포도뮤지엄 2층 전시장에서 펼쳐지고 있는 피에로 마네킹 전시 풍경이다. 5일부터 ‘디아스포라(이산)와 세상의 모든 소수자들’을 주제로 시작한 기획전 ‘그러나 우리가 사랑으로’의 핵심이랄 수 있는 스위스 출신 작가 우고 론디노네의 설치작품 <고독한 단어들>(2016)이다. 에폭시수지와 고무로 만든 등신대 크기 인형에 광대 복식을 입힌 피에로상 27점을 넓은 전시장 곳곳에 갖가지 모양새로 채워 넣은 것이 전체 얼개다. 작가가 애초 구상한 작품의 화두가 흥미롭다. ‘현대인 한 사람이 24시간 특정 장소에 고립됐을 때 취하는 행동은 어떤 것일까’란 가정 아래 졸거나, 멍하게 앉거나, 엎드려 뒤척이거나, 무언가를 듣거나, 방귀를 뀌거나 하는 등의 여러 권태롭고 피곤함에 찌든 몸짓들을 피에로상을 통해 재현한 것이다.
포도뮤지엄 2층 전시장에 펼쳐진 스위스 출신 작가 우고 론디노네의 2016년 작 설치작품 <고독한 단어들>의 전시 풍경. 노형석 기자
창에는 작가가 즐겨 쓰는 무지갯빛 색상의 투명 패널을 붙여 바깥의 햇살이 안쪽의 피에로들을 비추도록 했다. 조형적인 맥락에서 보면 창의 무지갯빛, 피에로의 발랄한 옷차림과 용모가 묵직한 설치작품의 구도와 어우러져 인상적인 대비 효과와 더불어 심리적으로 깊고 우울한 분위기가 색다르게 연출된다. 관객은 27개의 광대상마다 각각 곁에 앉아 포즈를 따라 하면서 작품과 교감할 수 있다. 전시를 차린 김희영 총괄디렉터는 “주류와 비주류의 구분을 떠나 지금 시대 일상과 경계에 얽매여 사는 우리 모두가 소수자임을 짚어주는 듯한 작품”이라고 소개했다.
<고독한 단어들>은 2019년 일본 국제미술제 아이치트리엔날레에 한국의 <평화의 소녀상>과 함께 대표작으로 출품된 바 있다. 당시 우익의 압력으로 <평화의 소녀상> 전시가 가로막히자 론디노네 작가가 연대와 항의의 뜻으로 함께 전시 중지를 요청했던 작품으로도 알려져 있다. 작가가 하나의 원본만 만들어 보관해오다 이번 전시를 계기로 포도뮤지엄이 전량을 사들여 소장하게 됐다. 원래 45점의 광대가 한 세트인데, 전시장이 좁아 이번엔 작가 의견을 받아 27점의 광대만 출품됐다. 성소수자인 작가의 정체성을 드러낸 또 다른 대표작인 무지갯빛 간판형 작품 <롱 라스트 해피>(2020)도 뮤지엄 건물 지붕 위에 선보이는 중이다.
정연두 작가가 지난 1년간 공들여 작업한 설탕공예 조형물. 20세기 초 하와이 사탕수수밭으로 결혼할 노동자를 찾아 떠났던 조선 여인들의 사진을 토대로 만든 작품이다. 노형석 기자
론디노네 작품 말고도 정연두, 강동주, 알프레도 앤 이자벨 아퀼리잔, 요코 오노 등 국내외 유명 현대미술가들이 ‘이산’(디아스포라)을 주제로 소외된 이들을 위로하고 교감하기 위해 만든 미디어아트, 회화, 영상, 조각 등 신작들을 보여준다. 특히 소외된 서민들이나 젊은이들의 이야기 사진 연작으로 잘 알려진 정연두 작가는 20세기 초 하와이의 사탕수수밭으로 개척 이민을 떠났던 조선 여인들의 기념사진을, 사탕수수를 직접 심고 채취해 얻은 종이와 설탕 등 재료를 써서 슈거크래프트(설탕공예) 조형물로 재현했다. 전시 취지는 물론 과거와 현대의 다양한 인간적 서사가 녹아든 작업 과정이 작가의 개성과 내공을 드러낸다. 내년 7월3일까지.
제주/노형석 기자
nuge@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