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치호 작가가 올해 그린 누드화 신작. <다시 일어서는 몸> 연작 중 하나다. 리넨 천 위에 아크릴 물감으로 그렸다. 전남도립미술관 제공
그의 그림은 질질 흘러내린다.
흘러내리는 것은 캔버스에 그려진 나이 든 아저씨들의 구부정하고 기우뚱한 알몸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그 추레한 몸을 묘사한 형상에서 계속 흘러내리고 고이곤 하는 아크릴 안료들의 중첩된 흔적들이다. 몸의 맥락에서 보면 땀이나 피처럼 비칠 수도 있겠다. 그림을 보는 관객은 두가지 단면을 다 보고 느끼게 된다. 작가가 원하는 밀도만큼의 안료를 화폭에 얹는 것은 다른 차원에서 삶의 밀도를 얹는 것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바닷바람이 불어오는 전남 여수 여자만 개펄가 작업실에서 20여년간 작업해온 중견 작가 박치호(55)씨의 근작들은 상처 나고 흉터 난 인간의 벗은 몸과 얼굴 자체를 클로즈업해 거대한 화면에 집요한 몸의 붓질로 형상화한다. 그의 대작들을 모은 개인전 ‘빅맨: 다시 일어서는 몸’이 지난달 중순부터 전남 광양 전남도립미술관에서 열리는 중이다. 여수 경도에서 태어나 지금도 바닷사람들을 숱하게 보고 만나며 그들의 삶과 육체를 관찰해온 작가는 몸의 형상과 그 위에 삶의 흔적으로 잠식된 상처를 치열하게 마주 보고 그려낸 대작들을 층고 높은 전시장 곳곳에 배치해 숙연하고 비장한 몸의 이야기들을 풀어낸다.
전남도립미술관에 마련된 박치호 작가의 개인전 ‘빅맨: 다시 일어서는 몸’의 전시 현장. 곳곳에 생채기가 난 사람 몸의 불안정한 모습을 부각시킨 누드 그림이 사방에 내걸렸다. 노형석 기자
지난 세기 프랑스 실존철학자 메를로퐁티가 갈파한 것처럼 몸은 우리의 지각현상이 일어나는 텃밭이며 모든 체험의 근원이 된다. 작가는 어촌에서 자란 어린 시절부터 바닷일을 하러 어선을 타고 나갔다가 스크루나 발동엔진에 손이 감겨 절단되며서 몸에 깊은 상처를 입은 어른과 형님들을 보았던 기억을 안고 미대를 졸업한 뒤 숙명적으로 몸이 지닌 상처를 탐색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번 전시에 나온 신작 52점을 포함한 회화, 조각, 드로잉 등 74점은 이런 맥락에서 몸의 형상에 깃들거나 스며든 내상과 외상 같은 여러 상처를 드러내는 작품들이라고 할 수 있다. 명확한 윤곽이나 형체 없이 기울어져 부유하는 전시장 들머리의 머리상들과 표정 없는 상들을 그린 <망각> 드로잉 연작을 필두로 상처투성이 알몸의 상체를 여러 각도에서 드러낸 전시장 내부의 대작들은 작가가 자신의 삶과 작업 속에서 체득한 몸의 실존을 페인트칠하듯 독특한 작업 방식으로 드러낸 결과물들이다.
박치호 작가가 지난해 그린 누드화 근작. <다시 일어서는 몸> 연작 중 하나다. 리넨 천 위에 아크릴 물감으로 그렸다. 전남도립미술관 제공
전시장 입구에 도열한 <망각>이란 제목의 연작 드로잉들. 노형석 기자
“화폭의 바탕을 돌가루로 세차례 바르고 다시 사포질한 뒤 드로잉하고 페인트 롤러로 반복적으로 아크릴 물감을 올리고 또 올려 화폭에 스며들게끔 했어요. 이런 방식으로 작업실 동네에 계시는 나이 든 어르신이나 중년 남성분들의 알몸을 관찰한 모습을 담아냈어요. 흘러내리고 고이는 회화 특유의 속성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계속 덧칠하고 안료를 툭툭 올리는 과정에서 작업의 밀도, 삶의 밀도, 삶의 상처 등에 대한 다양한 상념과 화두가 생겨났지요.”
그림 속에 표현된 알몸들의 상처는 다양하다. 넘어져 다치거나 날카로운 물건에 찔린 물리적 상처뿐 아니라, 탐식으로 살갗이 터져 오르거나 분홍빛의 미묘한 색감이 아롱지면서 과거 여순(여수·순천) 사건 등 지역 특유의 곡절 많은 현대사를 떠올리게 하는 몸 빛깔의 파노라마도 느끼게 된다. 작가는 “우리 몸은 사람의 삶 자체를 담은 역사의 무대이며 이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은 피부 표면의 질감과 상처”라며 “이런 신체의 상처를 직시하고 성찰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인간의 의미를 찾는 과정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박치호 작가. 전남 여수 작업실에서 포착한 모습이다. 전남도립미술관 제공
머릿속에서 개념적 사유만을 가동시키는 디지털 이미지들이 횡행하는 요즘 더욱 강렬하고 신선하게 다가오는 작업들이라고 할 수 있다. 개념과 유동의 의미만을 강조하는 지금 미술판의 흐름 속에서 정직하게 눈앞의 인간상과 몸의 이미지를 오롯이 몸으로 느끼며 표현한 자취를 기록했다는 점에서도 평단과 기획자들의 눈길을 받는 전시다. 8월21일까지.
광양/글·사진 노형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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