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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년 무대인생 내달려온 박정자…“팔순에 멜로라니 축복이죠”

등록 2022-09-30 07:00수정 2022-09-30 10:19

연극 ‘러브레터’ 개막 앞둔 박정자 인터뷰
올해로 ‘배우 인생 60년’을 맞은 박정자가 연극 <러브레터> 리허설을 하고 있다. 파크컴퍼니 제공
올해로 ‘배우 인생 60년’을 맞은 박정자가 연극 <러브레터> 리허설을 하고 있다. 파크컴퍼니 제공

“나한테 주연이 주어졌던 경우는 드물어요. 30년 가까이는 단역·조연만 했어요. 그런데 주연을 많이 했던 배우들은 지금 찾아볼 수 없어요. 무대에서 살아남지를 못해요. 인생이라는 무대에서도 그래요. 이건 굉장한 아이러니예요.”

‘배우 박정자’란 이름이 지워진 한국 연극사는 조금 밋밋하지 않을까. 팔순을 맞은 이 독특한 배우만큼 연극계에 뚜렷한 존재감을 새겨넣은 배우는 드물다. 그의 말대로 “배우의 존재감이란 게 꼭 주연을 하거나 예뻐야만 생기는 건 아니”기 때문일 거다. 올해로 연극 인생 60돌을 맞은 그는 요즘도 버스를 두번 타고 서울 대학로 연습실로 향한다. 배우 오영수와 짝을 이뤄 출연하는 연극 <러브레터>(10월6일~11월13일·서울 예술의전당 자유소극장)의 연습을 위해서다. 지난 19일 대학로의 한 카페에서 만난 박정자는 “오늘 하루도 각별하다. 그냥 모든 게 신기하고 감사하다”고 말문을 열었다.

연극 &lt;러브레터&gt;에 출연하는 배우 박정자. 파크컴퍼니 제공
연극 <러브레터>에 출연하는 배우 박정자. 파크컴퍼니 제공

“신구 선생이 출연한 연극 <두 교황>을 보고 기립박수를 쳤어요. 내가 그분 연극 보고 기립박수 보낸 건 처음이에요. 이제 내게 새로운 목표가 생겼어요. 신구 선생이 올해 86살인데, 나도 저 나이에 저런 무대에 서야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러니까, 끝이 없는 것 같아요.(웃음)” ‘배우에겐 나이가 없다’는 걸 그의 연극 인생이 입증한다. “1963년 연극 <베르나르다 알바의 집>에서 이미 80살 노인 역을 했어요. 가르시아 로르카의 작품인데, 내 나이 21살에 노망난 할머니 역할을 했단 말이죠. 돌이켜보면 배우한테 물리적인 나이는 그냥 하나의 숫자인 거죠.”

무대 위나 리허설 시간에만 배우로 사는 게 아니다. 버스 기다리는 동안에도 대사를 읊조린다. “<러브레터> 여주인공 멜리사의 대사를 중얼중얼해보는 거예요. 마스크를 썼으니 다른 사람들은 잘 못 알아듣잖아요.” <러브레터>는 멜리사와 앤디가 50년 동안 주고받은 러브레터 이야기다. 두 주인공이 편지를 읽는 형식이라 굳이 대사를 외울 필요가 없다. “그냥 대본을 읽으면 되는 연극인데 그것이 그렇게 어려워요. 그런데 내가 작품에 출연할 때마다 항상 어렵다고 했다는 거예요. 내 무대를 30년 이상 지켜본 친구가 그러더라고요.” 그는 “엄살이었는지 몰라도 연극을 어려워한 게 지금껏 내가 무대에 설 수 있었던 에너지가 아니었나 싶다”고 했다. “어떤 작품이든 쉽게 가본 적은 없어요. 어차피 올라야 하는 산, 건너야 하는 강이라고 생각했거든요.”

배우 박정자는 연극 &lt;러브레터&gt;에서 배우 오영수와 짝을 이뤄 출연한다. 1960년대 극단 ‘자유’에 몸담았던 두 사람은 1983년 연극 &lt;백양섬의 욕망&gt;에서 남녀 주인공으로 함께 무대에 올랐다. 파크컴퍼니 제공
배우 박정자는 연극 <러브레터>에서 배우 오영수와 짝을 이뤄 출연한다. 1960년대 극단 ‘자유’에 몸담았던 두 사람은 1983년 연극 <백양섬의 욕망>에서 남녀 주인공으로 함께 무대에 올랐다. 파크컴퍼니 제공

<러브레터>에서 박정자는 넷플릭스 시리즈 <오징어 게임>으로 크게 주목받은 배우 오영수와 짝을 이룬다. 사적인 자리에서 2년 연하인 오영수가 그를 부르는 호칭은 ‘박 선배’다. 두 사람은 1966년 창립된 극단 ‘자유’ 시절부터 함께 무대에 섰던 친숙한 사이. 둘이 짝을 이뤄 출연한 멜로 작품이 있다. <백양섬의 욕망>, 극작가 우고 베티의 연극이다. “젊어서는 멜로를 하죠. 그런데 80살에 <러브레터>란 멜로 작품을 하게 됐으니 배우로서 얼마나 큰 축복이에요. 지금 내가 멜로를 하면 안 되나요?(웃음)”

20살이던 1962년 연극 <페드라>로 데뷔한 이후 한해도 연극 무대를 거른 적이 없다. 초연, 재연을 합치면 출연 작품이 200편쯤 될 거라고 했다. “두 아이 막달(해산할 달)에도 무대에 섰지요. 미련한 바보죠. 근데 저한테는 그게 가장 큰 자랑거리예요. 그거 말곤 자랑이 없어요.” 그가 연극 인생 60년을 쉼 없이 달려오며 ‘개근’할 수 있었던 힘이 궁금했다. “세상에 빠르고 민첩하게 적응하려 하진 않았어요. 경제적인 것을 취하려 했다면 이 자리에 있을 수 없었겠지요.” 그는 “그냥 모자란 듯 사는 것이 너무 꽉 차게 사는 것보다 나았던 모양”이라고 했다.

1962년 연극 &lt;페드라&gt;로 데뷔한 박정자는 60년 동안 한해도 거르지 않고 연극 무대에 올랐다. 파크컴퍼니 제공
1962년 연극 <페드라>로 데뷔한 박정자는 60년 동안 한해도 거르지 않고 연극 무대에 올랐다. 파크컴퍼니 제공

수많은 출연작 중 <해롤드와 모드>는 그가 잊을 수 없는 연극이다. 19살 청년 해롤드와 80살 할머니 모드가 사랑에 빠지는 파격적인 이야기. 모드 역으로 7차례나 무대에 섰던 그의 ‘시그니처 공연’이다. 2002년 처음 이 역을 맡았을 당시 ‘80살까지 이 연극을 하겠다’고 공언했고, 우리 나이로 80살이 된 지난해 공연을 끝으로 그 약속을 지켰다. “작년 공연으로 숙제를 끝낸 거죠. 이제 내려놨어요. 앞으로는 이 작품 안 할 겁니다. 어떤 다른 배우가 할 수 있겠죠.” 최근 단역으로 출연한 <햄릿>과 할머니 역으로 나왔던 뮤지컬 <빌리 엘리어트>도 기억에 남는 작품으로 꼽았다. “언제든, 무슨 역이든 주어지면 기꺼이 참여할 거예요. 20대 연출가가 같이하자고 해도 부르는 데가 있으면 달려갈 겁니다.” 그에게 은퇴는 아직 먼 얘기다.

성우로 활동했던 그의 목소리는 한번 들으면 쉬이 잊히지 않는다. 낭랑하면서도 강인함이 느껴지는 특유의 중저음은 팔순에도 전혀 흩어지지 않는다. 봉준호 감독도 영화 <기생충> 예고편 내레이션을 목소리 자체로 호기심을 유발하는 박정자에게 요청했다. “연극배우로서 내 1순위 무기가 목소리죠. 내가 뭐, 예쁘지도 않고 팔등신도 아니잖아요. 다들 내 목소리 얘기를 먼저 해요. 얼굴은 잊어도 목소리는 기억나니까, 외모에 비할 바가 아니죠.(웃음)” 그에게 목소리 녹음은 일종의 아르바이트이기도 하다. “연극 개런티는 공개하면 안 돼요. 아주 비루해서 말할 수도 없어요.”

임석규 기자 sky@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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