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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음악·공연·전시

배우가 다큐로 전하는 4·3유족들의 피맺힌 구술

등록 2022-10-19 07:00수정 2022-10-19 08:39

이경성 연출 연극 ‘섬 이야기’ 20~23일 아르코예술극장서
연극 <섬 이야기>를 연출한 이경성 연출가(왼쪽 둘째)와 배우들이 작품의 배경인 제주도 현장을 답사하고 있다. 창작집단 바키 제공
연극 <섬 이야기>를 연출한 이경성 연출가(왼쪽 둘째)와 배우들이 작품의 배경인 제주도 현장을 답사하고 있다. 창작집단 바키 제공

태평양전쟁 말기 일본이 제주시 용담동에 만든 육군 비행장은 ‘정뜨르 비행장’으로 불렸다. 현재는 제주국제공항의 일부다. 4·3 당시 대규모 학살이 진행된 곳이기도 하다. 실험성 짙은 연극을 만들어온 이경성(39) 연출가와 창작집단 ‘바키’(VaQi)의 연극 <섬 이야기>는 이곳에서 발굴된 400여구의 유해에 주목한다.

“비행장 활주로 아래 우리가 잘 감각하지 못하는 땅의 맥락이 묻혀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됐죠.” 18일 서울 종로구 동숭동 대학로의 아르코예술극장에서 만난 이경성 연출가는 “어느 날 갑자기 가족을 잃어버린 사람들이 70년 만에 유해로 가족을 만나가는 과정”이라고 이 작품의 얼개를 설명했다.

이 작품은 배우가 대본에 따라 연기하는 통상적 연극과 다르다. 출연하는 배우 4명은 이 작품에서 연기자라기보다 낭독자에 가깝다. 4·3 때 가족을 잃은 3명과 유해 발굴을 책임진 사람의 얘기를 충실히 전달하는 데 치중한다.

“아직도 찾지 못한 유해들이 활주로 안에 많아요. 비행기가 이륙하고 착륙할 때마다 활주로 아래 유해들은 그 진동을 그대로 느끼고 있을 겁니다.” 유해발굴단장의 이런 얘기를 배우는 담백하게 전할 뿐이다. 배우들은 대본을 외웠지만 무대에서는 귀에 이어폰을 끼고 구술된 녹음을 들으며 말한다.

“죽은 어른들 눈물로 세수허연. 그 어른들 생각하면 눈물이 핑허게 나지. 그, 우크란가 어데 전쟁 일어나, 그걸 보민, 똑 우리 닮은 거라. 너무너무 불쌍해. 그걸 보는디, 나가 우리 같앙, 너무너무 불쌍해, 나라 뺏기고, 고생허고….” 4·3 학살에서 우크라이나 전쟁을 떠올리는 북촌리 이영자 할머니의 이 구술을 배우는 제주 특유의 억양을 살려 투박한 말투 그대로 관객에게 전달한다. 이경성 연출가는 “말의 의미 해석은 지연되겠지만 그 대신에 관객들에겐 다른 감각이 열릴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연극 &lt;섬 이야기&gt;를 연출한 이경성 연출가. 창작집단 바키 제공
연극 <섬 이야기>를 연출한 이경성 연출가. 창작집단 바키 제공

이경성과 창작집단 바키는 독특한 방식으로 대본을 완성해간다. 작품을 구상하고 기획하면서 대본을 여럿이 함께 가다듬고 구축한다. 연출가는 물론, 배우와 디자이너 등도 이 작업에 동참한다. 명실상부한 공동창작인 셈이다. 세월호를 다룬 <비포 애프터>, 난민 문제를 작품화한 <보더라인> 등 동시대 이슈를 다룬 작품들을 이런 방식으로 제작했다.

“(통상 다른 연극처럼 한 명의 작가가 창작한) 대본에서 출발하면 이미 작가의 1차 해석에 바탕을 둬야 하는데, 우리는 그게 성에 차지 않아요. 우리가 직접 바라보고 경험하고 싶은 거죠.” 이들의 작품을 흔히 ‘다큐멘터리 연극’이라고 부르지만, 이경성 연출가는 이 별칭이 썩 달갑지 않다. “정보를 그대로 보여주는 데 그치지 않아요. 연극적 장치를 통해 그 정보를 해석하고 확장합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그냥 연극을 하는 거죠.”

무대에 다양한 오브제가 등장하는 것도 ‘이경성표 연극’의 특징 가운데 하나다. 이번 작품에선 제주도 해변에 버려진 나뭇가지를 덧대고 붙여 인체로 형상화한 작품들이 나온다. 인형 디자이너이자 연출가인 이지형이 만들었다.

성균관대 연기예술학과 교수인 이경성은 국내는 물론 국외에서도 주목받는 연출가다. 내년엔 독일 뮌헨 국립극장 의뢰로 독일에서 작품을 무대에 올린다. 그가 현실에 대한 날카로운 통찰력 없이 독특한 발상과 새로운 기법 등 형식적 실험에만 주력했다면 국내외에서 이토록 주목받지는 못했을 것이다. 올해 ‘서울국제공연예술제’ 출품작인 연극 <섬 이야기>는 20일부터 23일까지 대학로 아르코예술극장에서 만날 수 있다.

임석규 기자 sky@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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