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속 군인들은 냉혈동물이다. 사람의 감정은 보이지 않는다. 검은 윤곽선으로 동그란 철모와 군복을 그려넣어 묘사한 병사들. 그들은 기계처럼 전진한다. 빨갛게 칠한 얼굴과 손에 무기를 올리고 가는 모습에서 강력한 살의가 전해져 온다.
지난 11일부터 서울 역삼동 두남재 아트센터에서 열리고 있는 중견 화가 4인 기획전 ‘기억의 장면들’ 전시장에 내걸린 서용선 작가의 구작 <병사들, 지리산>(2006)의 풍경이다. 이 그림은 한국전쟁 당시 지리산 빨치산 토벌 전투를 떠올리게 한다. 명징한 색감과 윤곽선이 차갑고 기계적인 전쟁의 비정한 율동을 소스라치게 각인시킨다. 이 그림 오른쪽 측면에 내걸린 작가의 2004년 작 <부역>은 전쟁 당시 포탄을 지게에 지고 전장에 나르는 장정들의 모습을 표정 없는 인형들의 행렬처럼 푸석푸석하고 음울한 색조로 묘사하고 있다.
신학철 작 <한국현대사_갑순이와 갑돌이>(밑그림 콜라주, 1998).
40여년간 역사화와 도시인간 연작을 그려온 서 작가가 그린 전쟁의 비인간성에 대한 회화적인 기록은 동선이 안쪽으로 진행될수록 더욱 점입가경의 경지로 접어든다. 뒤이어 마주치는 것이 유명한 <한국현대사> 연작의 신학철 작가가 지금도 계속 작업 중인 <한국현대사_갑순이와 갑돌이>의 밑그림 콜라주 작업(1998)이기 때문이다. 남근을 닮은 거대한 괴물이 한국 현대사의 기층과 상부를 휘감고 억누르며 숱한 정치 경제 사회의 인물 군상과 얽혀 있는 이 흑백 콜라주 작업은 이 땅의 근현대 역사를 움직인 온갖 비인간적인 질곡의 단면들을 그대로 드러내면서 서 작가의 전쟁 그림들과 오묘한 공통분모를 드러낸다.
전시장에 정현 작가가 1990년대 만든 브론즈 조각 <무제> 2점이 놓여 있다. 두 조형물 뒤로 서용선 작가의 그림 <부역>(2004), <음모>(1988), <작업실>(1997)이 내걸렸다.
전시장 앞 서두는 이오네스코의 부조리극 같은 화폭 공간에 부유하는 인간 군상의 혼란스러운 모습을 그려넣은 오원배 작가의 <무제> 그림과 뼈대만 구축하거나 갈라터진 돌덩어리 상을 통해 실존의 절박한 외침을 형상화한 정현 작가의 인간 군상이 관객을 맞는다.
‘기억의 장면들’전은 소장 작가 김기라씨가 기획자로 나서 만들었다. 1980~90년대 회화와 조각 장르에서 한국 현대미술의 휴머니즘을 정면으로 직시하며 각기 다른 결로 모색해온 70대 원로 중견작가 4명의 구작, 근작들을 추려 적실하게 대면시키면서 한국 휴머니즘 미술사의 낯선 구석을 들추어냈다. 그동안 공개되지 않았던 민중미술 대가 신학철 작가의 70년대 청년작가 시절 작품 <비상탈출> 연작 소품들을 처음 만나는 것도 전시 감상의 특전이다. 12월20일까지.
이번 전시에 처음 공개된 신학철 작가의 청년 시절 작품 <비상탈출> 연작 중 일부(1973).
글·사진 노형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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