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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음악·공연·전시

흑자, 다시 보면 더욱 귀한 평범함

등록 2022-12-10 11:00수정 2022-12-10 16:21

[한겨레S] 신지은의 옛날 문화재를 보러 갔다
‘흑자: 익숙하고도 낯선, 오烏’
흑유 각병과 두꺼비 모양 연적, 조선 후기,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흑유 각병과 두꺼비 모양 연적, 조선 후기,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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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온이 뚝 떨어진 아침, 출근 버스 안은 검은 롱패딩 점퍼를 입은 사람들이 가득하다. 이렇게 두툼한 점퍼를 무릎 밑까지 감싼 밋밋한 실루엣을 요새는 놀림조로 ‘김밥’이라고 부른단다. 북극의 찬 공기가 그대로 내리꽂히는 한반도의 겨울에는 어떤 일들이 일어나는가. 급하게 들이켜다 커피도 살짝 흘리고, 소맷부리 밑으로 때도 태우며 길고 긴 겨울은 흐른다. 그러니 추위를 막는 외투의 기본은 이런저런 삶의 얼룩들을 말없이 감춰주는 검은색일 수밖에.

우리 도자기에도 이런 무던한 검은빛이 있다. 산화철이 많이 섞여 검은 빛깔을 내는 유약인 흑유를 입힌 흑자(黑磁)다. 유약 성분이나 가마 안의 환경에 따라 새까만 색이 나오기도 하고, 다갈색이나 녹갈색에 가까운 빛깔이 나오기도 한다. 산화철은 가장 쉽게 구할 수 있는 안료이기 때문에, 그릇 장식에 사용된 역사도 깊다.

이렇게 흑자가 고려 시대부터 근대에 이르기까지 1천년 가까운 세월 동안 꾸준히 제작되고 쓰였는데도, 옛 기록에서는 그 이름을 거의 찾아볼 수 없다. 사람들이 이름에 쓰길 꺼려 하던 ‘흑’(黑) 자 대신 까마귀 ‘오’(烏) 자를 붙여 오자라고 불렀기 때문이다. 경기도자박물관의 ‘흑자: 익숙하고도 낯선, 오烏’(2023년 3월26일까지)는 긴 세월 동안 주목받지 못했던 이 검은 그릇들을 모아, 오늘날 이름인 흑자로 다시 부르며 하나하나 빛을 비추는 전시이다.

흑자의 시간, 검은빛이 퍼져나가다

흑자가 사람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았던 이유는 두가지다. 첫째, 청자와 백자에 비해 많이 만들지 않았다. 조선 후기에 경기도 각지에 흑자만 만드는 전용 가마가 세워지기까지, 흑자는 늘 청자나 분청사기, 백자 가마에 꼽사리 끼는 신세였다. 다른 그릇들과 똑같은 형태로 빚은 뒤에, 그중 소량만 유약을 달리 입혀 흑자를 만드는 식이었다. 그래서 고려 시대에는 청자 닮은 꼴, 조선 시대에는 분청사기 닮은 꼴이 된 흑자들을 바라보면, 마치 시대를 대표하는 도자기들의 그림자처럼 쓸쓸한 느낌도 든다.

고려 시대에는 접시와 찻주전자 같은 고급 식기부터 베개, 장구 등 생활용품까지 다양한 물건을 흑자로 만들었지만, 조선 시대가 되면 주로 음식물을 나르거나 저장하는 용도로 썼다. 서울 종로의 시전 터에서 나온 그릇들의 수수한 생김새는 오늘날 순댓국집 식탁에 놓인 대파와 양념이 든 항아리와 별반 다르지가 않다. 흑자가 상류층이 아닌 일반 사람들의 물건으로 저변화되었음을 잘 보여준다.

흑자의 일상적인 쓰임새는 풍속화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김홍도가 그린 <단원풍속도첩>, 특히 벼 타작 장면 속 양반 앞에 놓인 그릇들을 눈여겨봄 직하다. 술을 담는 병은 흑자, 입에 직접 닿는 술잔은 백자. 생활에 꼭 필요하지만 사진에 담고 싶지는 않은 밀폐용기 같은 것이 조선 시대 흑자의 포지션이었던 모양이다. 이렇게 실용품 위주로 만들고 써온 것이 흑자가 잘 알려지지 않은 두번째 이유라고 할 수 있다.

김홍도, 벼 타작(부분), &lt;단원풍속도첩&gt;, 조선, 보물.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김홍도, 벼 타작(부분), <단원풍속도첩>, 조선, 보물.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쓰기 좋고 아름다운 색

하지만 아름답기만 한 물건이 없듯이, 쓰임새만 가진 물건도 없다. 다양한 물건의 모양과 장식에 기발한 창의를 발휘하던 조선 후기가 되면, 비로소 흑자 본연의 아름다움에 주목한 물건들이 만들어진다. 납작 엎드린 두꺼비 연적에 시커먼 흑유를 입힌 것이나, 먹물 묻은 붓을 씻는 그릇을 아예 흑자로 만들어 유지 관리 걱정을 던 것 등이 그 예이다.

그 옆에 놓인 흑자 각병은 목이 긴 백자병을 각지게 깎고 흑유를 입힌 것이다. 튀어나온 모서리 부분은 흰 백토색이 거의 드러날 정도로 유약층이 아주 얇고, 편편한 면 가운데로 갈수록 검은빛이 깊어진다. 윤곽을 보면 위에서부터 쓱쓱 면을 깎아낸 솜씨가 더없이 상쾌하면서도, 검은 면들은 깊이를 모를 늪을 내려다보는 듯한 아슬아슬한 긴장감을 느끼게 한다. 이 유쾌한 리듬감은 한 점 한 점 필사의 공을 들여 만드는 현대 예술 작품과 다를 바가 없다. 검은색이라 더 멋있는 이 물건들에서는 예술적인 감각이 활짝 꽃을 피웠던 그 시대 사람들의 안목과 여유가 느껴진다.

찬방 선반, 창고 구석, 가마터에서 나와 전시실에 놓인 흑자들은 저마다의 개성을 뽐낸다. 손으로 잡기 편하게끔 허리 부분을 쑥 늘린 호리병 모양 병은 그런 매력을 만끽하기 좋은 유물이다. 이 병은 입부터 허리 위까지가 뭉긋하게 구부러져 있는데, 그 모양이 무척 태연해서 어쩐지 실패나 불량 같지가 않다. 마치 보는 눈이 없을 때 여기저기 통통 움직이며 다니다, 갑자기 인기척이 나는 바람에 우뚝 정지해버린 장난꾸러기 같다. 뒤에 걸린 참고 사진에선 원래의 디자인을 소개했는데, 그 일자로 반듯한 모습과 대조되어 넉살스러운 분위기가 더욱 살아난다.

흑유 호리병 모양 병, 조선 15~16세기, 국립전주박물관 소장.
흑유 호리병 모양 병, 조선 15~16세기, 국립전주박물관 소장.

‘대표’가 되어본 적 없어도

이렇게 만들고 쓰던 시대에는 그만큼 귀하지 않았을 수도 있는 물건들. 그러나 먼 훗날 새로운 시선으로 보면 새로운 아름다움과 가치가 보인다는 것이 옛 문화재들을 보는 기쁨 중 하나이다. 조선 후기에 만들어진 흑유 항아리는 흙 속 공기가 유약층을 뚫고 나오며 생긴 구멍으로 겉이 옴폭옴폭 얽어 있다. 가마에서 구워지며 생긴 공기구멍뿐만 아니라 여기저기 잔뜩 긁히고 쓸린 자국도 많아, 물건이라 해도 언뜻 보기가 안쓰러울 지경이다. 그러나 그 반질반질 광이 나는 표면을 가만히 바라보면, 어느새 동글동글한 공기구멍들이 마치 칠흑 같은 밤에 올려다보는 겨울 별자리들처럼 보인다.

흑유 항아리, 조선 19세기,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흑유 항아리, 조선 19세기,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어느 시대나 최고의 것, 최상의 것을 대표로 내세운다. 그러나 우리 도자기의 역사에서 한번도 대표가 되어본 적 없는, 보통 사람이 먹고 사는 공간을 지켜온 흑자는 평범한 일상 속에야말로 귀하고 진실된 것들이 깃든다는 것을 가만히 말해준다. 갈색, 녹갈색, 흑갈색, 암갈색, 칠흑색…. 검은색이라는 이름으로 적당히 뭉뚱그려도 저마다의 빛깔은 결코 같아지지 않는 흑자들이 모여 선 모습은 오늘날 우리 삶 속을 가로지르는 다양한 평범을 떠올리게 한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는 나태주의 시 ‘풀꽃’ 구절을 떠올리다, “다시 보면 더욱 귀하다” 하고 마음속으로 한줄을 덧붙인다. 겨울 밤하늘 같은 흑자의 모습을 마음에 담고서 다시 ‘김밥’이 되어 길로 나서는 순간. 이 평범이 따스한 평온으로 이어지기를 빌어보는 12월이다.

문화재 칼럼니스트

박물관과 미술관의 문화재 전시나 전통문화를 주제로 한 전시를 소개합니다. 우리 문화재를 사회 이슈나 일상과 연결하여 바라보며, 보도자료에는 나오지 않는 관람 포인트를 짚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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