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수 이은하(사진 왼쪽)와 이은하의 ‘밤차’로 편곡상을 수상한 뒤 기념촬영을 한 ‘데블스’와 지인들. 하얀색 모자를 쓴 이가 편곡을 맡은 김명길.
한국팝의사건·사고60년 (42) 아리송한 시대에 기적소리 울리며 나타난 이은하
음악인과 활동 시대를 실제와 달리 바꿔 상상하면 어떨까. 예컨대 ‘서태지가 1960년대에 활동했다면’이라든가 ‘신중현과 김추자가 2000년대에 데뷔했다면’ 같은 가정 말이다. 동일한 맥락에 1970~80년대를 풍미한 톱 가수 이은하를 대입해보면 어떨까. 즉 이은하가 1990년대에 가요계에 입문했다면 어떤 양상을 보여주었을까 하는 상상 말이다. 기왕 상상의 나래를 펼치는 김에 더 나가자면 옥주현이 이은하의 시대에 활동했다면 어땠을까 하고 ‘가볍게’ 가정해 보는 것도 흥미로울 듯하다. 뜬금없이 웬 옥주현이냐고 묻는다면, 어린 나이에 데뷔했고 댄스곡으로 스타덤에 올랐으며 동시대에 돋보이는 가창력을 자랑했고 초기에 몸매와 관련된 유쾌하지 않은 별명이 따라붙었다는 점에서 같이 짝 지울 수 있다는 답변이 가능할 것이다. 여기서 더 나가면 정색하고 반문할 팬들이 많을 테니 이후의 상상은 각자에 맡긴다. 이은하를 소개하며 ‘1970~80년대의 옥주현’이라고 비유한다면 20대 이하의 독자를 위한 배려 때문이지 그 이상은 아니다. 이은하가 1977년부터 1985년까지 한해도 빠뜨리지 않고 한 방송사의 10대 가수상을 수상했다는 사실은 하나의 방증이다. 이은하는 1973년 십대 중반의 나이에 ‘임마중’(김주명 작사, 김준규 작곡)으로 데뷔했다. 짧은 시기에 여러 종의 음반을 내놓은 그는 어린 나이라곤 믿기 힘든 음색과 솔풀한 가창으로 ‘제2의 정훈희’ 또는 ‘제2의 김추자’가 될 자질이 충분해 보였지만 아직은 때가 아니었다. ‘안개’나 ‘늦기 전에’ 만큼의 곡도 받지 못했고 ‘방송에 적합한’ 외모가 아니라는 황당한 이유로 제대로 ‘얼굴 알리기’도 할 수 없었기 때문. 이은하가 스타덤에 오른 건 그로부터 5년 뒤였다. ‘아직도 그대는 내 사랑’(태정 작사, 원희명 작곡)으로 주목받은 뒤 1978년 ‘밤차’(유승엽 작사 작곡), 1979년 ‘아리송해’(이은하 작사, 이승대 작곡), ‘봄비’(이희우 작사, 김희갑 작곡)를 연달아 히트시키며 정상에 올랐다. 특히 빠른 템포의 훵키한 곡들인 ‘밤차’와 ‘아리송해’는 ‘제3한강교’ ‘새벽비’(혜은이)와 쌍벽을 이루며 디스코 시대의 여명을 밝혔다. 이은하가 손을 권총 모양으로 만들어 머리 위로 ‘동서남북’을 찌르며 육감적으로 춤추던 모습은 1970년대 말 디스코 춤에 대한 ‘스냅사진’으로 또렷하게 남아 있다. 여기서 질문. ‘밤차’와 ‘아리송해’는 감각적인 편곡 및 사운드로 갈무리되지 않았더라도 상업적 성공과 호평을 이끌어낼 수 있었을까. 기억 속이나 노래방에서가 아니라 실제 음원을 다시 들어보면 이 곡들은 솔/훵크(soul/funk)에 정통한 인물이 뛰어나게 마감된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그가 누굴까. 이 연재에서 몇 차례 언급한 적 있는 솔 그룹 사운드 ‘데블스’의 김명길이다. 편곡과 기타 연주를 담당한 그는 혁신적인 짜임새와 관능적인 그루브로 곡의 매력을 극대화시킨 일등공신이었다. 참고로 ‘아리송해’에는 또 다른 세션이 참여했는데, 뒤에서 코러스를 넣은 이들은 다름 아닌 ‘벗님들’이다. ‘짚시여인’ ‘사랑의 슬픔’의 그 벗님들? 맞다. 하지만 ‘아리송해’ 때는 3인조로 편성도 달랐고 음악 색채로 퍽 달랐다. 하긴 이때로부터 일이 년 전엔 벗님들이 통기타 듀엣이었다. 이 얘기를 풀어가자면 공간을 이동해야 할 것이다. 대학 캠퍼스로. 이용우/대중음악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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