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만든 청동상 <탄생>. 암사슴에서 여인이 탄생하는 상상의 순간을 빚어냈다. 노형석 기자
지난해 10월29일 밤에 벌어진 이태원 참사는 희생자 159명의 몸에 닥친 비극이기도 했다.
참사 직후 일부 미술인들 사이에선 희생자들이 겪었을 고통을 참담한 마음으로 떠올리며 눈길을 줄 수밖에 없었다는 인근 전시장의 설치 조형물이 입에 오르내렸다. 삼성미술관 리움 들머리에 자리한 페이스갤러리 한국지점 3층 테라스 공간 바닥에 모로 누운 앳된 여인과 그 위에 살포시 앉은 양 한마리로 이뤄진 청동조형물. 미국 여성주의 미술 거장 키키 스미스(69)의 대표작 <초원-기대다>였다. 원래 루이스 캐럴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를 모티브로 동화적 세계를 떠도는 인간과 동물의 모습을 상상해 만들었지만, 나약한 자세로 쓰러진 푸석한 질감의 소녀 상과 희생양처럼 앉은 양의 모습은 참사 희생자들의 몸이 느꼈을 고통에 대한 갖가지 상념을 관객에게 떠올리게 했다. 1990년대 이후 인간의 몸과 장기 등을 형상화한 조형물로 세계 현대미술사에 새 지형을 닦은 여성주의 거장의 보이지 않는 힘이 참사를 계기로 새롭게 작동한 셈이다.
작업 중인 키키 스미스. ⓒ Chris Sanders
키키 스미스가 만든 대표작들 가운데 하나로 꼽히는 <초원-기대기>. 노형석 기자
지금 키키 스미스의 작품들은 한국에서 전시 중이다. 1980~90년대 여성성과 신체를 다룬 구상조각으로 세계적 주목을 받아온 그의 아시아 첫 미술관 개인전이 지난해 12월부터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다. <초원-기대다>와 맥락이 닿는 여러 청동 조형물과 판화, 사진, 태피스트리, 아티스트북 등 작품 140여점이 나왔다.
들머리에 있는 2004년에 만든 청동제 조형물 <메두사>와 베네치아 강변에 푸르게 빛나는 햇무리를 담은 프린트 작업 등으로 시작하는 출품작들은 깊고 풍요로우면서도 처연하다. 여성을 비롯한 인간의 몸과 동식물, 우주 등으로 80년대 이래 응시와 교감 대상을 확장해온 키키 스미스의 세계를 대변하는 독창적 조형물과 다채로운 재료 위에 그려진 그림들, 스테인드글라스 등이 등장한다. 2001년 작 청동조형물 <황홀>은 전시 대표작으로, 늑대의 배를 가르고 밖으로 내딛는 여성의 자태를 형상화했다. 서구 미술사의 명화들에서 수동적 포즈로 우아하게 등장하는 신화 속 여인들의 이미지와는 상반된 충격적 구도와 당당한 자태가 주목된다. 암사슴에서 여인이 탄생하는 순간을 빚어낸 2002년 작 <탄생>도 같은 맥락에서 1990년대~2000년대 초반 그의 전신상 작업들을 대표한다. 2012년 작 <컬러 노이즈>는 석판화 기법과 사진의 잉크젯 프린트 기법을 뒤섞어 작업한 것으로 상단에는 각도를 달리해 찍은 작가의 사진을 인쇄했고 하단에는 색면으로 구성된 수채화풍의 이미지들이 입혀졌다.
키키 스미스가 2001년 제작한 청동조형물 <황홀>. 늑대의 배를 가르고 밖으로 내딛는 여성의 비장한 모습을 형상화했다. 노형석 기자
키키 스미스가 2004년 만든 청동제 조형물 <메두사>. 노형석 기자
정작 기대와 달리 전시 구성과 기획은 산만하고 지루하다는 평이다. 기획자는 몸과 우주, 생태에 대한 시야를 확장시켜온 작가의 에너지를 90년대 그린 누드 자화상 판화 제목인 ‘자유낙하’란 열쇳말로 풀어냈지만, 명확하게 개념이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무엇보다 80년대 아버지와 동생의 죽음 이후로 지금 현실의 인체와 장기를 드러내는 실존적 조형물에 몰두하게 된 그의 작업 이력 초반부에 대한 설명이 별로 없이 근작에만 초점을 두려는 것이 허점이다. 작가에게 떨어짐, 곧 낙하란 이상과 기념비가 아닌 죽음을 앞둔 인간 조건의 깨달음이었다. 이를 넘어서는 과감한 해석을 제기하려면 이를 뒷받침하는 작업 내용을 설득력 있는 방식으로 연출해야 한다. 미술인들이 주로 보는 실험전이 아니라 대중 관객을 위한 미술사 전시인 까닭이다. 12일까지.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