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대전’ 전시장 들머리 공간에 나온 위수빈 작가의 캐릭터 그림들. 아이패드로 작업한 일러스트 성격의 애니메이션 인물 캐릭터 이미지에 군데군데 유화물감의 붓터치를 덧붙여 만들었다.
현대미술의 세계는 참으로 요상하다. 최근에는 ‘코딱지 칵테일’이 전시장에 출품작으로 등장했다.
칵테일용 유리잔의 입 대는 부분에 코딱지 덩어리들을 빙 둘러 묻혀놓은 것이 작품이다. 마르가리타 등 일부 칵테일의 잔에 묻히는 소금이나 설탕 대신 핥으라는 것일까. 한국예술종합학교 미술원 졸업반인 예비작가 이정윤씨는 ‘엽기 발랄’한 자신의 근작 조형물에 <실전토익>이라는 제목을 붙였다. 어처구니없는 이름인데, 풀어 쓴 부제를 보면 언뜻 이해될 법도 하다. ‘실존이 전지적으로 토할 것 같아도 익숙한 일입니다.’
어리둥절하게 바라보는 관객에게 작가가 보충 설명을 해준다. “매일 바닥에 떨어지는 머리카락들을 치워야 하듯 살아 있어서 뭔가 수행해야 하는 것들이 많잖아요. 내 육체를 위해 봉사해야 할 게 널려 있는, 그 살아 있음의 역겨움에 대해 축배를 들고 싶은 생각으로 칵테일 만들듯 코딱지를 모아서 잔에 붙이는 작업을 해봤지요. 유리 공예를 배운 터라 유리잔도 직접 만들었습니다.”
<실전토익>을 비롯한 이 작가의 발칙한 근작들은 서울 불광동 먹자골목 안 식당 남극회관 건물 2층의 대안공간 ‘신사옥’에 마련된 청년작가 기획전 ‘전국대전’에서 선보이는 중이다.
이정윤 작가의 단채널 영상작품 <슬픈 비디오>(2022). ‘슬퍼! 슬퍼!’를 외치며 발랄하게 서울 거리를 뛰어가는 작가의 달리기 퍼포먼스를 담았다.
“슬퍼! 슬퍼!”를 발랄하게 외치면서 서울 시내 거리를 뛰어다니거나 휘발유통에 담긴 기름(실제는 물)을 몸에 붓고 라이터불을 켜면서 자신의 생일 축하 노래를 부르는 작가의 영상들도 함께 나오는데, 한결같이 발랄한 유머와 기묘한 배경이 뒤섞여 있다. 출구가 별반 보이지 않는 지금 청년세대의 답답함과 고뇌를 모순 어린 몸짓으로 풀어낸 작업으로도 비친다.
지난달 24일 아트스페이스 신사옥의 ‘전국대전’ 전시장에서 만난 기획자 옥정호씨.
‘전국대전’은 쫄쫄이 옷을 입은 남자가 러닝머신이나 물가에서 허망한 행동을 반복하는 영상·사진 시리즈로 잘 알려진 소장 작가 옥정호씨가 기획했다. 지난해 국내 미술대학을 졸업하고 새 출발 하는 예비 미술가들 가운데 유망 작가들을 선정해 주목받을 기회를 마련해주는 ‘올작’(올해의 졸업 작품) 프로젝트다. 전국 미대 졸업전시(졸전) 현장을 미리 살펴보고 될성부를 작가들을 선정해 한자리에 전시하는 것이 핵심. 옥씨는 지난해 상반기 ‘신사옥’을 개설한 뒤 11~12월 전국 각지 미대 졸전 44군데를 죽 돌며 훑어봤다. 그 뒤 함께 전시를 답사한 부인 이지영 작가와 “풀어내려는 내용과 형식이 잘 맞아떨어지고 결과물의 완성도가 뛰어난” 예비작가 11명의 작품들을 추려 1부(2월24일~3월10일)와 2부(3월17~31일)로 나눠 선보이고 있다.
전시장 들머리에서 처음 관객을 맞는 박진희 작가의 2022년 작 <인간의 형태 1>. 직사각형 모양의 작은 상자형 장지 화폭 20여개를 맞붙여놓고 그 위에 전선줄과 플러그가 뒤엉킨 일상의 배선 풍경을 그려넣었다. 복잡하게 꼬이고 엮인 지금 사회 인간들의 관계망을 은유한 그림이다.
전시장 면적은 33㎡(10평)도 채 안 되지만 회화가 절반 이상인 출품작들은 특이하고 날것 느낌 나는 일상과 내면의 이미지들을 쏟아낸다. 들머리에서 만나는 숙명여대 졸업반 박진희 작가의 2022년 작 <인간의 형태 1>은 엉킬 대로 엉킨 배선들의 골치 아픈 풍경이 붓질의 대상으로 들어왔다. 직사각형 모양의 작은 상자형 장지 화폭 20여개를 맞붙여놓고 그 위에 전선줄과 플러그가 뒤엉킨 일상의 배선들이 접속된 풍경을 그려넣었다. 복잡하게 꼬이고 엮인 지금 사회 인간들의 관계망이자 이런 관계들이 언제 합선이나 폭발로 이어질지 모르는 불안한 정서가 회색빛의 조각난 화폭들 위를 부유한다.
조선대 미대를 졸업한 위수빈 작가는 미소녀를 담은 캐릭터 그림들로 눈길을 끈다. 아이패드로 작업한 일러스트 성격의 애니메이션 인물 캐릭터 이미지에 군데군데 유화물감의 붓터치를 덧붙여서 수작업 그림과 디지털 일러스트 경계를 녹여낸 색다른 분위기의 회화를 만들었다.
1부 전시에 나온 정영권 작가의 2022년 작 <주체성에 대한 사실상의 종결 선언>. 한 개인의 심각한 죽음도 전체 사회에선 일개 파편화한 사건일 뿐이라는 메시지를 드러낸다. 한지에 분채안료와 금가루를 써서 그린 한국화 화폭이란 점이 독특하다.
홍익대에서 동양화를 전공한 정영권 작가의 작품들은 한 개인의 죽음과 이를 둘러싼 사회적 시선을 하드보일드한 분위기로 담아 보여준다. 한지에 분채안료와 금가루를 써서 그린 한국화 화폭에 매달리거나 피를 흘리며 쓰러진 망자를 냉정하게 바라보거나 외면하며 손짓하는 경찰들의 군상이 등장하는데, 심각한 죽음도 전체 사회에선 일개 파편화한 사건일 뿐이라는 메시지를 드러낸다.
오는 10일 끝나는 1부에 이어 17일부터 시작하는 2부에서는 에스엔에스(SNS)의 소비적 이미지들을 팝아트적인 인형 조형물로 드러낸 장이륜 작가, 현실의 바위와 숲 아래 미니어처 집들을 놓은 가상의 풍경을 소묘해 회화로 빚어낸 유문선 작가 등 6명의 작품들이 전시될 예정이다.
장이륜 작가의 팝아트적인 조형물 <과시적 소비>(2022). 17~31일 이어질 ‘전국대전’ 2부 출품작이다.
졸전은 문자 그대로 끝마무리를 짓는 전시다. 고민은 그다음부터다. 마무리를 짓고 새롭게 출발하느냐, 아니면 사라지거나 졸렬하고 구차하게 연명하느냐 하는 선택이 기다린다. 옥씨는 이번 전시가 이런 졸전의 의미를 증폭시키는 일종의 워밍업이라고 평가한다. 기존 졸전에서 단골 장르였던 누드화나 사진들이 거의 사라지고 3D 프린팅이나 일러스트 같은 캐릭터 작품들이 확연한 주역으로 등장했다는 점을 새로운 흐름으로 확인했다고 그는 말했다.
“지금 규모나 내용은 아직 초라하지만, 엠제트(MZ)세대 청년작가들이 더욱 다채로운 가능성을 실험할 기본 무대인 ‘졸전’을 새롭게 업그레이드하려고 합니다. 영호남, 충청권, 수도권 등 각 지역 졸전들의 특징과 흐름을 엮는 기획전으로 좀 더 세분화하면서 서울과 지역의 미술 격차를 줄이는 계기로 삼고 싶습니다.”
글·사진 노형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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