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백자전의 하이라이트 격인 블랙박스 1부 전시장. 42점의 국보, 보물 백자 명품들이 각각 독립된 진열장 속에 놓여 관객을 맞는다. 명품들 앞머리에 15세기 작품인 백자청화매죽무늬항아리(개인 소장)가 빛난다.
온갖 욕망들이 스며든 덩어리였다.
전시장에 널리고 널린 조선시대 백자 도자기 명품들은 스스로 정체를 드러내고 있었다. 대부분의 명품들은 자기들이 고고한 선비의 마음을 담은 물건이 아니었다고 웅변했다. 보는 순간 왕실의 권위로 작동하며 무릎을 조아리게 만드는 장대한 용무늬 항아리(용준)와 임금 부럽지 않은 양반 집안의 부와 권세를 과시하는 백자 대호, 갖은 식물이 들어간 청화백자 항아리 같은 상징물들이 먼저 입구에 도열했다. 종이든 도자든 화폭을 가리지 않는 화가의 실력을 뽐내는 무대였다. 삼류 장인이 납기일에 맞추기 위해 대충 덤벙덤벙 그린 범작들은 지하층 진열장에서 나름의 미감을 은은하게 빛내고 있었다.
지하 전시장 끝부분. 오른쪽과 안쪽 에스컬레이터 옆에 조선 후기 백자대호가 보인다. 천장에는 길쭉한 빈 기둥 모양의 은은한 조명등을 달아 백자를 비추도록 했다.
서울 이태원 삼성 리움미술관이 지난달 28일부터 지하 기획전시실에서 시작한 기획전 ‘조선의 백자, 군자지향(君子志向)’은 진중한 전시 제목의 공허함부터 다가온다. 군자지향은 선비의 삶을 사는 군자의 맑은 모습과 정체성을 따르고 반영한다는 의미를 지닌 조어다. 조선백자가 군자의 의미를 담고 있다는 말이지만, 전시장의 명품들은 대부분 군자와는 거리가 있다.
2004년 개관 이래 도자기만을 주제로 기획한 리움의 첫 특별전이며, 한국·일본·중국의 조선백자 명품들을 한자리에서 망라한 전례 없는 대형 전시라는 특장을 고려하면, 이런 공허함은 더욱 여실하게 느껴진다. 국가지정문화재 59점 중 절반이 넘는 31점과 일본에 소재한 수준급 백자 34점을 포함해 총 185점을 선보이는 이 전시의 핵심은 명백히 꿈틀거리는 삶과 욕망이기 때문이다. 세상살이의 생리와 욕망이 꿈틀거리고 뒤엉킨 조선시대 사람들의 생생한 내면이 청색 안료 코발트, 철과 구리 성분 안료를 입혀 다채로운 무늬와 기형으로 빚어낸 청화·철화·동화 백자의 여러 이미지들 속에 녹아 면면히 흐르고 있다.
낚시를 하는 동자를 그린 18세기 후반의 백자청화병. 간송미술관 소장품이다. 조선 후기 청화백자병을 수놓은 그림들 가운데 가장 뛰어난 격조를 지닌 명품으로 꼽힌다.
전시 기획의 핵심은 들어가자마자 만나는 1부 ‘절정, 조선백자’의 영역이다. 네덜란드 건축 거장 렘 콜하스가 만든 블랙박스 전시실 내부를 가득 채운 42점의 국보급 백자 명품들의 압도적 장관을 보여준다. 앞은 청화, 중간은 철화, 맨 뒤는 달항아리로 열을 구분해 조화를 이루면서 별처럼 빛나는 명품 백자의 소우주를 구축해 놓았다.
조선 초기 청화백자 중에서도 당당한 형태와 화려한 그림 장식으로 널리 알려진 <백자청화 매죽문 호>(국보)와 고려의 매병에서 조선의 호로 변해가는 과도기적 특징을 보여주는 <백자청화 홍치명 송죽문 호>(국보)를 필두로, 조선 후기 청화백자병을 수놓는 그림들 가운데 가장 뛰어난 격조를 지닌 명품으로 낚시를 하는 동자를 그린 18세기 후반 백자청화병(간송미술관 소장품)이 관객의 눈을 환희심으로 물들게 한다. 하지만 엄정한 대칭형 구도 속에 순백의 미감을 발산하는 15세기 백자반합을 제외하면, 군자지향이라는 의미와 형식을 재단할 수 있는 작품은 그다지 도드라지지 않는다.
반추상화한 물고기 무늬가 들어간 17세기의 백자철화병. 이름 없는 장인이 간략하게 특징만 묘사해 그린 이 그림은 현대 추상회화를 방불케 하는 조형미를 발산한다.
지하층 전시실에는 청화, 철화·동화, 순백자 순으로 세분화된 백자 명품들을 각각의 정제된 진열장에서 보여주는 얼개를 띠고 있다. 단연 고갱이로 꼽히는 건 실물 구경하기가 어려운 조선 중후기 철화·동화 백자 명품들이다. 가마 온도를 섭씨 1350도 기준으로 1~2도가량 오르내리도록 잘 조절해야만 제대로 발색돼 무늬가 잘 나타나기 때문이다.
1996년 크리스티 경매에서 당시 세계 도자기 경매 최고가 기록을 세웠던 조선 중기의 백자철화 운룡문 호와 꽃 모양을 빙글빙글 돌아가는 선들의 뭉치로 표현한 백자철화 초화문 호, 반추상화한 물고기 무늬가 들어간 17세기 백자철화 병은 20세기 현대 추상회화의 감각을 떠올리게 하는 무명 장인의 손맛이 강렬한 인상을 남긴다.
철화와 동화 안료로 자줏빛, 붉은빛 선으로 그린 무늬들도 발상과 상상력, 기법 등이 놀랍기 그지없다. 익살스러운 호랑이 등 민화풍 그림과 모던한 기하학적 무늬 등이 잊을 수 없는 감흥을 남긴다. 청화백자는 18세기 회화적인 맛을 더하면서 까치·호랑이와 소상팔경도, 동자도 등 회화적 정경을 정교하게 받아들이면서 또 다른 조선적 특징을 보여준다. 흔히 조선 전기 분청사기를 파격의 미학, 현대의 모던한 감성을 선험적으로 구현한 명품이라고 이야기하지만, 이 전시는 파격적인 철화·동화 작품들의 향연을 구현하면서 조선 중기와 후기 민화의 도상을 선취한 백자 도자사의 다채로운 일면을 처음 본격적으로 보여준다.
버드나무에 그네를 매달고 타는 소녀의 모습을 담은 19세기의 백자청화병. 소녀의 정감 가득한 얼굴이 인상적으로 다가온다. 전시를 준비한 리움 학예사들 사이에서 ‘춘향이’란 별명이 붙여졌다고 한다.
전시 제목은 방향이 빗나간 느낌이지만, 명품 콘텐츠들 자체로 백자에 대한 학계 일반의 선입견과 통속적 시각을 뛰어넘었다는 의미는 지나칠 수 없다. 잘 알려지지 않은 조선백자의 다채로운 면모를 한·중·일 희귀 백자 컬렉션 대여와 철화·동화 백자 등의 유례없는 집중 전시로 드러냈지만, 전시의 가치를 뒷받침하는 철화·동화 안료기법의 가치와 제작 기법상의 중요성, 19세기 백자 쇠퇴기의 변화된 양상 등에 대한 설명 없이 명품들의 이미지 잔치로만 끝난 대목은 한계로 남는다. 5월28일까지.
무덤 속에 껴묻거리로 묻었던 17세기의 백자철채인형들. ‘명기’라고 부른다.
글·사진 노형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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