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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음악·공연·전시

‘불온한 예술가’ 이랑과 모어, 세종문화회관을 접수하다

등록 2023-05-25 15:08수정 2023-05-26 02:50

이랑&모어, 8월8일 싱크넥스트 23 무대에
세종문화회관 여름축제인 ‘싱크넥스트 23’ 라인업 발표 때 포즈를 취한 이랑(오른쪽)과 모어. 세종문화회관 제공.
세종문화회관 여름축제인 ‘싱크넥스트 23’ 라인업 발표 때 포즈를 취한 이랑(오른쪽)과 모어. 세종문화회관 제공.

“맨날 집회 트럭 위에서 노래하다 드디어 세종문화회관에 들어가게 됐으니 감개무량하죠.”(이랑)

“행복해요. 요즘엔 칼라에 심취해서 가능하면 튀고 칼라풀하고 아름다워지고 싶어요.”(모어)

광화문광장 집회에서 노래하고, 이태원 지하클럽에서 춤추며 살아온 두 예술가가 마침내 세종문화회관 무대에 오른다. 낯설고 이질적인 존재로 취급돼온 두 사람이 서울의 대표적 공연 공간을 ‘접수’하게 됐으니 감회가 남다르지 않을 수 없다. 싱어송라이터이자 영화감독, 소설과 에세이 작가인 이랑(37)과 ‘발레리나’이자 드랙 아티스트, 배우이자 작가인 모어(모지민·45)가 펼치는 ‘릴레이 낭독극’이다. 시와 노래에 발레와 드랙을 버무린 ‘버라이어티 쇼’가 될 것 같다. 지난 22일 세종문화회관에서 만난 두 사람은 신랄하면서 유쾌했고, 때로 우울했지만 대체로 행복해 보였다.

공연 제목은 <왜 내가 너의 친구라고 말하지 않는 것인가>. 세종문화회관 여름축제인 ‘싱크넥스트 23’에 선정돼 오는 8월8일 에스(S)씨어터 무대에 풀어낸다. 세종문화회관이 두 사람에게 먼저 협업을 제안했다는 점에서 이 공연은 ‘불온하고 전위적인’ 두 예술가의 ‘제도권 편입 의례’로도 읽힌다. 지난해 노래 ‘늑대가 나타났다’를 둘러싼 검열 논란을 겪은 이랑에겐 더욱 각별하게 다가올 수밖에 없는 공연이다. ‘뜨거운 예술가들’이 총출동하는 ‘싱크넥스트 시리즈’ 중에서도 단연 눈길을 끈다. 티켓 판매 속도도 가장 빠르다고 세종문화회관 쪽은 전했다.

“모어란 사람의 화려함 뒤에 있는 외로움, 혼자 일상과 싸우는 모습을 드러내고 싶어요.” 이랑은 “낭송과 노래가 있고, 시가 흐르면서 춤을 추는 역동적인 무대가 될 것”이라며 “일과 일상과 예술, 외로움과 버림받음에 관한 쇼”라고 소개했다. 모어는 “드랙과 발레를 혼합시킨 유일무이한 장르”에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낯설고 이질적이고 모호한 행위”를 예고했다. 지난해 3집 앨범 <늑대가 나타났다>로 한국대중음악상 ‘올해의 음반상’을 받은 이랑이 모어의 시에 곡을 붙인 새 노래도 선보인다. 60분짜리 공연이 끝나면 ‘애프터 파티’도 있다. 공연 내용이 아니라 ‘공연 이후’ 때문에 ‘18살 이상’ 등급이 붙었다.

모어는 한국예술종합학교에서 발레를 전공했다. 성 소수자로서 ‘발레리노 아닌 발레리나’의 삶을 살고 싶었지만 폭력적 현실 앞에 좌절했고, 죽을 듯한 번민과 고통 끝에 드랙을 선택했다. 세상 어디에도 속할 수 없는 ‘털 난 물고기’라는 뜻에서 지은 예명이 모어(毛漁). 지난해 6월 개봉한 다큐멘터리 영화 <모어>는 그의 애환 어린 삶과 독보적 퍼포먼스, 세상을 향한 당당한 외침을 담아냈다. 드랙은 본인의 생물학적 성별과 상관없이 의상과 메이크업 등을 통해 표현하고자 하는 젠더를 마음껏 드러내는 것이다. 성 소수자(퀴어)들이 자신을 표현하는 수단이기도 하다.

공연 제목에 사연이 있다. 지난해 9월 국회에서 진행한 <모어> 상영회에서 이랑과 모어, 장혜영 정의당 의원이 관객과의 대화를 진행했다. 여야 모든 의원에게 초청장을 돌렸지만 행사를 주최한 장 의원 말고 다른 국회의원은 아무도 오지 않았다. “대체 언제까지 나의 존재를 부정할 것인가. 나는 낯설거나 이상하거나 무서운 존재가 아니다. 나는 하루하루 성실히 살아가는 너의 옆집에 사는 사람일 뿐이다.” 그날 모어가 했던 마무리 발언이다. 이랑은 “그땐 좀 슬펐고 통탄스러웠다”며 “차별금지법과 성 소수자 인권 문제를 실제 당사자들이 얘기하려 했는데 국회의원 아무도 우리 존재를 보러 오지 않더라”고 했다.

이들의 첫 인연은 2013년 홍대 공연장 롤링홀 대기실에서 시작됐다. 이랑이 ‘다짜고짜 먼저 다가가’ 말을 걸었다. “딱 보는데 너무 끌리는 사람이 앉아 있는 거예요. 당시엔 드랙 문화를 몰랐는데 듣도 보도 못한 존재가 너무 예쁘고 아름다웠어요.” 당시 모어는 멕시코 화가 ‘프리다 칼로’의 분장을 하고 있었다. 이후 두 사람은 친구이자 예술적 파트너로 각별한 관계를 이어왔다. 모어는 이랑의 뮤직비디오에 출연했고, 이랑은 영화 <모어>의 음악감독을 맡았다. 때로 부부란 오해도 받는데, ‘부부 사이’란 보도가 나오기도 했다. 이랑은 “삶과 예술과 우정과 사랑을 나눌 수 있는 사람을 찾았으니 그때 말 걸길 잘한 것 같다”며 웃었다. 모어는 “저한테 예술적 영감을 많이 주는 사람”이라며 “이랑은 천재”라고 소개했다.

두 사람은 색깔이 다르다. 이랑은 담백하지만 강하고 직설적이다. 모어는 화려하고 발칙한 겉모습 이면에 꾹꾹 감정을 찍어누른 흔적이 엿보인다. “저는 외롭고 괴로운 가운데 꾸역꾸역 해나가는데, 모어는 매 순간 아름다움을 찾아요.”(이랑) “절망의 구렁텅이에 희망이 도사리고 있잖아요. 하염없는 아름다움에 속에서 허우적대다가 죽어야지요. 지금까지 욕창 속의 구더기 같은 삶을 살았다면 지금부터는 힘들어도 아름답게 살다 가고 싶어요.”(모어)

두 사람 모두 주변인, 경계인으로 살아왔다. “내가 뭘 하면 다들 무섭대요. ‘너는 무섭고 이상하다’는 얘기를 수도 없이 들었어요. 이 사회에서 내가 좀 낯선 색깔인 모양이에요.” 모어는 “한국 사회에서는 그냥 묻혀 지내야 편하게 살 수 있는 것 같다”며 웃었다. “색깔 드러내지 말고 의견 내지 말라는 얘기를 너무 많이 들었어요. 집회 같은 데 다니지 말라는 얘기도요.” 이랑은 “입이 있으니까 말을 하는 것일 뿐”이라고 했다. 이랑은 스스로에게 ‘민중가수’란 정체성을 부여해 왔다.

지난해 9월 영화 &lt;모어&gt; 국회 상영회에서 이랑이 사회를 봤다. 왼쪽부터 이랑, 모어, 장혜영 정의당 의원. 이랑 제공
지난해 9월 영화 <모어> 국회 상영회에서 이랑이 사회를 봤다. 왼쪽부터 이랑, 모어, 장혜영 정의당 의원. 이랑 제공

“대한민국에 우리같은 아티스트가 있다는 걸 감사한 줄 알아야 해.” 둘만 있을 때 자주 하는 얘기다. “대중적으로 겁나게 성공한 건 아니지만 작업에 프라이드를 가지고 있거든요. ‘프런티어로서 뭔가 또 보여줘야겠군’ 이런 생각도 하고 있죠.” 두 사람에게 동료 연예인·예술인들의 지지는 든든한 힘이 된다. “문화예술계에 팬이라고 하시는 분들이 많아요. ‘아티스트들의 아티스트’라는 게 굉장히 뿌듯하고 영광스러워요.”(이랑) “피를 토해야만 했던 20년의 세월이 있어서인지 이젠 무대가 무섭지 않고 기대가 되고 자신감이 생겼어요.”(모어)

임석규 기자 sky@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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