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광고

광고닫기

광고

본문

광고

문화 음악·공연·전시

75m 위에서 내려다본 노동 현실, 연극 ‘굴뚝을 기다리며’

등록 2023-05-30 10:35수정 2023-05-30 10:45

연극 <굴뚝을 기다리며>는 고공 농성 노동자들의 이야기를 사무엘 베케트의 부조리극 <고도를 기다리며>에 빗대 만들었다. 극단 ‘고래’ 제공
연극 <굴뚝을 기다리며>는 고공 농성 노동자들의 이야기를 사무엘 베케트의 부조리극 <고도를 기다리며>에 빗대 만들었다. 극단 ‘고래’ 제공

75m 고공, 어느 굴뚝 위의 두 남자 나나와 누누. 그곳이 굴뚝 위란 걸 알지 못한 채 하염없이 굴뚝을 기다린다. 실없는 말의 유희와 종잡을 수 없는 대화 속에 속절없이 시간은 흐르고 기다리는 굴뚝은 끝내 오지 않는다.

극단 ‘고래’의 연극 <굴뚝을 기다리며>는 제목에서 드러나듯 사무엘 베케트의 부조리극 <고도를 기다리며>를 오마주한 작품이다. 75m 높이의 서울 목동 열병합발전소 굴뚝에 올랐다가 426일 만에 내려온 파인텍 노동자 2명을 소재로 삼았다. 연극은 극한의 상황에 놓인 두 남자의 실존적 고뇌에 초점을 맞춘다. 6월11일까지 서울 대학로 연구소극장.

굴뚝 위엔 누누와 나나만 있는 게 아니다. 청소노동자 ‘청소’와 청소 로봇 ‘미소’, 심부름해결사 소녀 ‘이소’ 등 세 명의 방문객이 차례로 등장한다. 한국 사회의 노동 현실에 로봇과 인공지능이 대체하는 인간 노동력, 청년 세대의 노동 등의 주제를 담아낸다. 2021년 초연 이후 2년 만에 세상이 급변해 대본을 수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한다. 챗 GPT와 메타버스 등 바뀐 시대상을 반영해야 했기 때문이다. 진지한 주제인데도 불쑥불쑥 튀어나오는 유머코드와 격렬하면서도 슬며시 웃음을 자아내는 춤동작 때문인지 그리 무겁지 않게 다가온다.

&lt;고도를 기다리며&gt;가 삶의 부조리성과 아이러니를 담아냈다면, &lt;굴뚝을 기다리며&gt;는 일하는 것의 가치와 현대적 삶의 의미를 묻는다. 극단 ‘고래’ 제공
<고도를 기다리며>가 삶의 부조리성과 아이러니를 담아냈다면, <굴뚝을 기다리며>는 일하는 것의 가치와 현대적 삶의 의미를 묻는다. 극단 ‘고래’ 제공

<고도를 기다리며>가 오지 않는 고도를 기약 없이 기다리는 디디와 고고의 모습에서 삶의 부조리성과 아이러니를 담아냈다면, <굴뚝을 기다리며>는 굴뚝 위에 올라야 했던 해고 노동자들의 이야기를 통해 일하는 것의 가치와 현대적 삶의 의미를 묻는다. 희곡을 쓰고 연출한 이해성 극단 ‘고래’ 대표의 개인적 체험이 곳곳에 스며 있다.

작품을 쓴 계기는 2016년 ‘블랙리스트 사태’ 당시 광화문 광장 캠핑촌에서 굴뚝 위에 오른 노동자들의 이야기를 듣게 되면서였다. 이후 2018년 겨울, 파인텍 해고노동자 홍기탁, 박준호의 고공농성에 연대해 15일간 동조 단식을 하면서 작품을 구체화했다. 408일 동안 고공 농성을 벌였던 파인텍의 또다른 노동자 차광호가 굴뚝 위에서 쓴 일기도 대사에 담아냈다. 마지막 부분의 문학적 대사는 차광호의 일기에서 그대로 차용했다.

“거창한 구호나 선전이 아니라 따뜻한 예술작품으로 그리려 했어요. 관객이 조금 쉽고 편안하게 다가갔으면 하는 느낌으로 만들었습니다.” 이해성 연출은 “두 사람이 있던 75m 굴뚝 위를 올려다볼 때마다 이상하게 베케트의 연극 속 고도가 떠올랐다”며 “영하 40도까지 떨어지는 고통스러운 상황에서 ‘두 사람은 무슨 생각을 하고 무엇을 기다리는 걸까’란 의문 속에서 대본을 썼다”고 말했다. 이해성 연출은 “두 사람이 끊임없이 기다린다는 설정은 ‘고도를 기다리며’에서 가져왔지만 나머지는 다 다르다”고 했다. 연극에서 “굴뚝 위에서 밧줄은 밥줄”이란 대사와 함께 밧줄을 떨어트리는 장면이 나온다. 고공 농성 현장에서 실제로 있었던 장면이다. 이 연출은 “그들이 목숨 걸고 하고자 했던 얘기를 공유해보자는 취지에서 작품을 만들었다”고 말했다.

나나는 굴뚝을 기다리는 70m 상공, 그리고 굴뚝이 없다고 믿는 지상 가운데 어느 곳이 낫겠느냐고 묻는다. ‘원래부터 굴뚝 따윈 없었어’라고 하면서 내려오면 그만일테지만, ‘굴뚝’에 대한 믿음이 사라지는 순간 이들 앞엔 그저 남루한 삶이 놓여있을 거다. 홍철희(나나)와 오찬혁(누누) 외에 사현명(청소), 김재환(미소), 김예람(이소)이 출연한다.

임석규 기자 sky@hani.co.kr

연극 &lt;굴뚝을 기다리며&gt;의 희곡도 쓴 연출가 이해성은 2018년 파인텍 해고노동자 홍기탁, 박준호의 고공농성에 연대해 15일간 동조 단식을 하면서 작품을 구체화했다. 극단 ‘고래’ 제공
연극 <굴뚝을 기다리며>의 희곡도 쓴 연출가 이해성은 2018년 파인텍 해고노동자 홍기탁, 박준호의 고공농성에 연대해 15일간 동조 단식을 하면서 작품을 구체화했다. 극단 ‘고래’ 제공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
언론 자유를 위해,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한겨레 저널리즘을 후원해주세요

광고

광고

광고

문화 많이 보는 기사

‘의인 김재규’ 옆에 섰던 인권변호사의 회고록 1.

‘의인 김재규’ 옆에 섰던 인권변호사의 회고록

‘너의 유토피아’ 정보라 작가의 ‘투쟁’을 질투하다 2.

‘너의 유토피아’ 정보라 작가의 ‘투쟁’을 질투하다

‘여자 둘이 살고 있습니다’, 억대 선인세 영·미에 수출…“이례적” 3.

‘여자 둘이 살고 있습니다’, 억대 선인세 영·미에 수출…“이례적”

노래로 확장한 ‘원영적 사고’…아이브의 거침없는 1위 질주 4.

노래로 확장한 ‘원영적 사고’…아이브의 거침없는 1위 질주

9년 만에 연극 무대 선 김강우 “2시간 하프마라톤 뛰는 느낌” 5.

9년 만에 연극 무대 선 김강우 “2시간 하프마라톤 뛰는 느낌”

한겨레와 친구하기

1/ 2/ 3


서비스 전체보기

전체
정치
사회
전국
경제
국제
문화
스포츠
미래과학
애니멀피플
기후변화&
휴심정
오피니언
만화 | ESC | 한겨레S | 연재 | 이슈 | 함께하는교육 | HERI 이슈 | 서울&
포토
한겨레TV
뉴스서비스
매거진

맨위로
뉴스레터, 올해 가장 잘한 일 구독신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