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산방컬렉션 기획전에서 가장 주목되는 작품들 가운데 하나로 꼽히는 심산 노수현의 대작 ‘추경’.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이 땅에 압축성장의 시대가 열린 1970년대 초반부터 한국인의 생활문화에 불어닥친 큰 변화가 아파트 열풍이었다. 거실, 부엌, 안방 등으로 구획된 거주공간을 붕어빵을 형틀로 찍어내듯 수백, 수천여개씩 똑같은 모양으로 대량생산한 뒤 통째로 엮어 세운 기묘한 집합구조물들은 내 집 마련과 재산증식을 위한 중산층의 꿈 자체였고, ‘복부인’들의 투기 온상이 된다.
이런 아파트 건립과 구매 열기는 엉뚱하게도 미술시장까지 출렁거리게 만들었다. 이른바 ‘동양화’라고 흔히 불렀던 근대 작가들의 전통 서화풍 그림(한국화)이 아파트 입주민들한테서 큰 인기를 모으면서 값이 천정부지로 뛰는 현상이 나타난 것이다. 길쭉하게 내거는 족자나 접었다가 길흉사 때 옆으로 펼치는 병풍 그림만 주로 알았던 사람들은 반듯한 유리 액자에 표구된 고풍스런 그림이 아파트 집 거실과 안방 벽에서 자신들의 품격을 과시하는 뛰어난 장식물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국내 화랑가에서 좋았던 시절로 종종 회자되는 ‘70년대 동양화의 대유행 시기(혹은 전성시대)’가 열린 것이다.
화상들은 아파트와 함께 찾아온 호경기에 반색했고, 일부 언론사는 청전 이상범, 소정 변관식, 이당 김은호 등 일제강점기 이후 원로가 된 대가들의 그림들을 6대가 혹은 10대가 등으로 명명하면서 집단전시회를 여는 게 유행이 됐다. 청전과 이당 등 일부 원로대가들의 그림은 당시에도 1억원을 넘는 거액에 팔렸다.
남농 허건의 말년기 최고 수작으로 꼽히는 ‘추경산수’.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극소수이긴 했지만, 한국전쟁 이후 묵묵히 사재를 털어 고서화와 근대기 대가와 소장작가들의 한국화를 수집해온 정통 컬렉터들은 시장의 동양화 열풍을 마냥 흐뭇하게 바라볼 수는 없었다. 오직 장식물 취향으로 고서화와 전통계승 그림들을 구매하고 바람을 부추기는 대중의 낮은 취향을 달가워하지 않았기에 뚜렷하게 격을 두는 컬렉션을 구축하고 싶어했다. 미술 대중화와는 별개로 독보적인 명가를 꾸리기 위한 유한층 수집가들의 물밑 노력이 이런 배경 아래 일어나게 된다. 수집과 미술 공부를 중시한 삼성가의 호암 이병철과 후계자 이건희처럼 2세 경영의 인문적 텃밭으로서 컬렉션 안목을 대대로 잇는 데 공들이거나 호림미술관 창립자인 실업가 윤장섭(1922~2016)처럼 황수영, 최순우 같은 감식안의 대가들로부터 조력을 받으면서 민예품 등 묻혔던 분야의 명품들을 확보하는 흐름이 있었다. 다른 한편으로는 큐레이터가 전시를 만들 듯 색다른 구성으로 자기 컬렉션을 재편, 과시하려는 흐름도 나타난다.
지난 5월부터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에서 진행중인 한국화의 최고 명가 동산방화랑의 창업주 고 박주환(1929~2020) 회장의 기증 컬렉션 특별전 ‘동녘에서 거닐다’(내년 2월12일까지)는 이런 물밑의 미술사를 슬쩍 드러낸 전시다. 1960년대 초 전통 그림들의 뒷면과 가장자리를 액자나 천 등으로 덧대어 튼튼하게 보존해주는 표구(장황) 가게로 시작해 1974년 동산방 화랑을 열어 한국화 전시의 최고 명가로 만든 박 회장이 1970년대 명망있는 컬렉터의 품격 높은 기획 컬렉션 과정을 담은 명품들을 선별해 수집했고, 그 대표작들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이 전시회는 고인의 아들 박우홍(71) 현 동산방 대표가 지난해 미술관에 기증한 209점의 한국화 작품들 가운데 작가 57명의 작품 90점을 추려 선보이고 있는데 박 대표가 단연 손꼽는 수작 2점이 바로 이런 기획컬렉션을 대표한다. 가로 길이가 140㎝를 넘는 한국화 거장 심산 노수현(1899~1978)의 ‘추경’과 남농 허건(1907~1987)의 ‘추경산수’란 그림이다. 심산의 ‘추경’은 적갈색 암봉과 계곡물이 흐르는 정면의 암산과 그를 둘러싼 단풍 숲들이 작가 특유의 태점 묘사로 펼쳐지고 이런 근경을 중심으로 배후 원경에 구름 휩싸인 암봉들을 신비스럽게 배치해놓았다. 장쾌하면서도 섬세한 그의 산수화는 앞머리에 선배 화가인 이당 김은호의 매화 대작과 같이 펼쳐져 있다. 남농의 그림은 좀 더 뒤쪽 방에 있다. 덩어리진 먹의 자취들이 펄펄 살아 움직이는 듯한 착시감을 자아내면서 푸릇한 강변 소나무 숲이 바람에 하늘거리는 역동적 상황을 강조한 남농의 남도 산수가 고암 이응로의 1941년작 ‘공주 풍경’ 등과 마주 본다.
우리 산하가 펼쳐놓은 다채로운 풍경을 담은 두 산수화는 1970년대 서울 성북동 부촌에 살던 굴지의 컬렉터 이희원 회장의 소장품들이었다. 실업가 출신으로 젊을 적부터 사업 못지않게 고미술과 한국화에 각별한 관심을 쏟으며 금강안을 닦은 그는 지금 거의 잊혀진 존재가 됐지만, 당시엔 재력과 안목을 두루 갖춰 대수장가로서의 면모까지 보여주었던 인물로 화상들의 입에 오르내렸다. 특히 이 땅의 사계절에 자연과 어우러진 인간의 모습이 엿보이는 산촌, 농촌의 풍경을 사실적으로 드러낸 청전 이상범(1897~1972)의 회화컬렉션은 당대 최고 수준의 평가를 받았다.
그런 그가 70년대 초반 고심 끝에 과감하고 창의적인 기획을 고안하게 된다. 일제강점기부터 활동해온 현역 작가로 당대 한국화 최고 경지에 올랐다고 평가받는 네 사람의 대가, 청전 이상범, 그와 맞수로 지목되곤 했던 소정 변관식(1899~1976), 심산, 남농에게 일일이 당신들 말년의 최고 대표작으로 남을 걸작을 그려달라고 직접 전갈을 넣어 수년 동안 충분한 시간을 두고 넉 점의 대작을 그려 받겠다는 복안이었다.
심산 노수현 작 ‘추경’의 세부.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이미 화단의 최고 거두로 인정받던 청전 그림의 최고 수집가로 이름난 터여서 네 대가는 제안을 흔쾌히 수락했고, 1974년까지 이 회장의 성북동 자택으로 대가 4명이 그린 말년 신작 4점이 차례차례 모이게 된다. 가로 길이가 140㎝를 넘는 대작들의 구도와 필치, 내용들은 간간이 성북동 자택을 방문한 작가들과 컬렉터의 교감 속에서 만들어진 것으로 전해진다. 대가들의 그림을 오롯이 자기 의지로 그리게 해서 마침내 자기 수중에 넣은 이 회장은 성북동 집 거실에 네 그림을 모두 걸어놓고 날마다 혼자 또는 지인들과 감상하는 안복을 누렸다. 하지만 걸출한 넉 점으로 꾸려진 성북동 거실의 낭만은 이후 컬렉터가 타계하면서 지속되지 못하고 1990년대 후손이 매각하면서 작품들은 흩어지게 되었다.
이 회장과 교유가 있었던 박주환 회장은 이 그림들에 남다른 관심을 갖게 된다. 1970년대 이 회장이 대가들의 신작을 자체 주문해 따로 컬렉션을 꾸렸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언젠가는 이 그림들과 함께할 것이라는 예감을 품었던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이 회장이 타계한 지 상당한 시간이 지난 1990년대 중반 후손에 의해 넉 점의 그림이 차례차례 시중에 나오게 되자, 박 회장은 곧장 흥정에 나서 이번에 기증한 심산과 남농의 작품 두 점 외에 청전의 걸작까지 사들이는 데 성공한다. 박우홍 대표는 “청전을 포함한 세 대가의 작품은 부친이 생전 가장 깊은 관심을 가졌고 입수한 뒤 큰 자부심을 드러내셨던 그림들”이라며 “세 대가의 그림을 모두 확보한 뒤 집무실에 걸어놓고 저를 불러 ‘내가 이 그림들 중 하나를 준다면 너는 어느 걸 택할 것이냐’며 기쁨에 겨워하셨던 모습이 선하다”고 했다. 하지만 청전의 작품은 2016년 박주환 회장이 다른 컬렉터에게 매각해 이번 출품작에는 포함돼 있지 않다. 소정 변관식의 작품은 매각됐다고 알려졌을 뿐 현재 행방이 묘연하다.
남농 허건 작 ‘추경산수’의 세부.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전시된 두 작품 외에 흩어진 청전과 소정의 작품들이 다시 한자리에 모여 선보일 수 있을지도 앞으로 화랑가의 내밀한 관심사가 될 것으로 보인다. 안목 높은 최고의 컬렉터와 필력 뛰어난 최고의 대가들이 합작해 신작 컬렉션을 구축한 사례가 우리 근현대 미술사에 거의 없고, 제작에 최선을 다했다는 점이 높은 화격으로 드러나는 까닭이다. 일부 전문가들은 네 작품의 제작이 당대 화랑가의 주요 이슈였고, 컬렉터와 박 회장과의 일화도 각별해 다른 이의 손에 들어간 2점을 수소문하는 것이 불가능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전망도 내비쳤다. 해강 김규진의 1920년대 풍죽 그림으로 시작하는 동산방컬렉션 전은 한국화의 과거와 현재를 한달음에 일러주는 미술사 책 같은 전시회다. 1920년대부터 2000년대까지 전통 회화를 계승한 한국화 명작과 이 작품들을 보존해주는 장황(표구) 작업의 지난한 변모와 모색 과정을 시원시원한 대작들 위주의 구성으로 일목요연하게 풀어 보여주고 있다.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도판 국립현대미술관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