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길수 작가의 유화 근작 ‘박새’(2022).
20세기초 미국 대도시 공간과 소외된 시민들 모습을 묘사했던 에드워드 호퍼(1882~1967). 이 거장화가가 지금 서울 근교 공장단지의 작업 풍경을 보았다면 어떤 그림을 빚어냈을까.
이달 초부터 서울 불광역 부근 전시공간 신사옥에 펼쳐진 노동자 화가 이길수(50)씨의 개인전 ‘엣지 앤 보링(Edge & Boring)’은 자연스럽게 이런 미술사적 공상을 떠올려보게 한다. ‘가장자리와 지루함’으로 번역할 수 있는 전시 제목이 시사하듯이 작가가 유화 물감으로 그린 출품작들은 계약직이 넘치는 한국 도시노동 현장의 진부함과 권태감을 호퍼 스타일의 침울하고 차분한 색감으로 실감 나게 형상화하고 있다.
창백한 푸른 톤이 지배하는 화면에는 패널을 둘러쳐 가건물로 만든 수도권 근교 전형적인 산단 공장의 모습과 창 바깥으로 들어온 희끄무레한 햇살, 쌓인 패널과 판, 기계들 사이로 먼지덩이들이 떠도는 듯한 작업장 구석구석의 세부가 나타난다. 무엇보다 주목되는 요소는 도드라지는 대기감. 검회색 빛의 하늘과 건물, 묵묵히 자기 일에만 열중하는 공장 노동자들 사이로 내리누르는 듯한 대기의 존재가 여러 톤의 청회색빛 색감을 통해 와닿는다.
이씨는 경력단절을 딛고 선 화가다. 원래 경희대 회화과를 나와 화가로 활동하다가 국외로 나가 다른 여행사업을 하면서 화업을 접었다. 그 뒤 사업이 실패하면서 수도권 가구부품 공장에서 수년간 노동하면서 생계를 잇다가 이 과정에서 다시 붓을 잡게 됐다. 주 중에는 통근시간 합쳐 10시간 이상을 패널을 둘러친 공장 건물 안에서 일했던 그는 이런 나날이 거듭되자 자신이 생각하고 몸을 놀리는 현실 공간 자체를 붓질로 드러내고 싶다는 욕구를 느꼈다.
주말에만 화업에 매달렸다는 작가는 화폭에서 자신도 모르게 창백한 푸른 톤 구도로 공단의 풍경과 작업장의 이모저모를 그리고 있음을 뒤늦게 자각했다고 털어놓았다.
2000년대 이후 외국인 계약직 노동자들이 주로 일하는 도시 교외 공장단지는 한국인들에게 익숙하긴 해도 일체 관심 두고 싶지 않은 좀비 시설물의 전형이 되었다. 외면받는 노동공간을 동시대 화가의 화폭에 미학적 탐구의 대상으로 들여왔다는 의미가 가볍지 않다. 24일까지.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도판 신사옥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