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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음악·공연·전시

권력자의 탐욕과 역사의 물살 견뎌내고 물 위로

등록 2023-09-23 18:00수정 2023-09-23 21:11

[한겨레S] 신지은의 옛날 문화재를 보러 갔다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특별전 ‘고려도기’
고려시대 난파선에서 나온 도기 항아리들. 신지은 제공
고려시대 난파선에서 나온 도기 항아리들. 신지은 제공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의 특별전 ‘고려도기’(목포해양유물전시관, 내년 1월14일까지)는 고려시대에 만들어진 도기를 소개하는 전시다. 도기는 흙으로 만들어 1200도 미만의 온도에서 구운 그릇이다. 자기는 유약을 입혀 이보다 높은 온도에서 굽는다. 고려시대 도기는 대부분 유약을 입히지 않은 것으로 자기보다 소박하다.

이 전시는 고려시대에 각종 음식물을 보관하는 요긴한 생활용기이자, 전국 각지의 특산물을 멀리 실어 나른 운반용기였던 도기의 쓰임새를 조명한다. 그리고 쓰임새를 살피는 시선은 만들고 쓰던 그 시대 사람들의 삶으로 옮겨간다. 당시 세련된 색채의 유약을 발랐던 고려청자는 이전 시대엔 없던 고급 신소재로, 값비싼 청자나 금속 그릇을 쓸 수 없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일상에서 도기나 나무그릇을 주로 사용했다.

전시의 부제인 ‘산도해도 주재도기’(山島海道 舟載陶器)는 “섬과 바닷길에선 배가 도기를 실어 나른다”는 뜻이다. 고려에 다녀간 송나라 사신 서긍의 문장을 빌린 이 제목에 전시를 아우르는 주제가 오롯이 담겨 있다. 전시에 나온 고려 도기들이 배에 실려 운반되던 것이기 때문이다. 도기 항아리는 도시에서 물독으로 쓰는 구리 항아리에 비하면 값싼 물건이지만, 뭍과 바다를 오가는 뱃사람들에게 더없이 귀중한 자원이었을 것이다. 그 모습을 눈여겨본 외국 사신의 기록 한 줄은 바닷길을 삶의 터전으로 삼은 고려 사람들의 삶을 생생하게 담아냈다.

강화도로 수도를 옮겨놓고…

전시는 커다란 창으로 목포 바다가 내다보이는 공간에서 시작한다. 세심하게 조명을 조절해 놓은 전시들에 익숙한 이들에게는, 햇빛 속에서 유물을 보는 도입부의 느낌이 무척 각별할 것이다. 종이나 나무와 달리, 고온에서 구워 만든 도기는 햇빛에 노출돼도 상하지 않기에 가능한 연출이다.

먼저 관람객을 맞이하는 것은 웬만한 냉장고 한 대와 맞먹는 용량의 커다란 도기 항아리다. 어린이 관람객보다도 키가 큰 대형 항아리부터 손바닥에 쏙 들어오는 병까지, 70여점의 유물을 훑고 나면 도기의 든든한 회색 빛깔이 차분히 눈에 익는다. 그때나 지금이나 청자만큼 귀하게 여겨지진 않아도, 도기는 오랜 세월 사람들의 삶에서 요긴하게 쓰이며 사랑받은 그릇이었다.

고려 후기 문인인 이규보가 쓴 ‘동국이상국집’에는 그의 ‘최애 도기 술병’을 묘사한 시가 실려 있다. 그 병에 평생 담고 따른 술이 몇 섬인지 세지도 못한다는 너스레와 함께, “무겁지도 가볍지도 않아서 한 손으로 들기 알맞고 값도 싸 구하기 쉬우니 깨진대도 무슨 원망을 하리”라는 알뜰한 찬사를 펼친다.

그 담백하고 친근한 질감을 좋아한 고려의 상류층은 도기를 청자나 금속기와 똑같이 만들어 쓰기도 했다. 베개와 정병, 매병 같은 고급 물건들이 광택과 빛깔만 다른 두 가지 버전으로 나와 있다. 내 취향은 청자인지 도기인지, 고려 귀족이 된 기분으로 자신의 취향을 가늠해볼 수도 있다.

전시의 하이라이트는 고려시대 침몰선들에서 건져낸 유물들을 소개하는 3부다. 태안 인근의 험한 바닷길을 지나다 침몰한 고려 배들은 그 앞에 있는 섬 이름을 따 ‘마도 1·2·3호선’으로 불린다. 특히 마도 3호선에서 나온 유물들에는 여수에서 출발한 무신집권기 권력자(유천우, 신윤화, 윤기화 등)의 ‘개인 택배’들이 담겨 있었다. 옛날에는 화물을 부칠 때 수취인과 내용물을 적은 나무 막대기를 매달았다. 목간, 죽간이라고 부르는 이 표지가 오늘날로 치면 택배 운송장인 셈이다.

도기 항아리, 목간과 함께 전복 등 특산품이 담긴 항아리를 재현했다. 신지은 제공
도기 항아리, 목간과 함께 전복 등 특산품이 담긴 항아리를 재현했다. 신지은 제공

2011년에 발굴된 마도 3호선의 목간 35점을 분석해 보니, 배에는 전복과 홍합, 상어포, 각종 젓갈, 꿩 등을 담은 도기와 대바구니가 실렸다는 것이 밝혀졌다. 전시에서는 재현품과 모형을 활용해서 배에 실린 물건들을 실감나게 재현해 마치 선실 안을 구경하는 듯한 느낌을 준다. 항아리에 100개씩 꽉꽉 눌러 담은 전복, 요즈음 사람들도 먹어보기도 힘든 농게젓갈, 전복젓갈 모형들이 줄지어 놓여 있다.

그 옛날에도 여수에서 강화도까지 저 갖가지 식재료를 주문해서 소비했다는 사실은 놀라우면서 놀랍지 않다. 서해에서 잡히는 민어의 뼈가 경주 서봉총에서 나왔듯이, 먹을 것에 대한 한국인들의 열정은 뿌리가 깊지 않은가. 다만 몽골(몽고)과 긴 전쟁을 치르느라 수도까지 섬으로 옮겼던 시기에도 왕의 생일상은 풍성하고 사치스러웠으며, 권력자들은 수시로 먼바다의 진미를 넉넉히 누리며 생활했다는 것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이 역시 놀라우면서 놀랍지 않다고 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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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돌목에서 발굴된 물동이

3부에서 특히 눈길이 가는 것은 마도 3호선 이야기를 해피엔딩으로 새롭게 스토리텔링한 애니메이션 영상이다. ‘고려사’에는 무신정권 시기 권력자였던 김준이라는 인물이 왕의 생일에 사치스러운 술과 음식을 바쳤다는 기록이 있다. 그런데 마도 3호선에서도 김준이 수취인으로 적힌 목간이 나왔다. 전시는 이 겹치는 지점에 주목해, 이 배에 실린 수많은 식재료들이 ‘왕의 만찬’에 쓰일 식재료였을지도 모른다는 상상을 펼친다.

배가 풍랑을 이겨내고 왕의 생일잔치가 열리는 강화도에 무사히 도착하는 결말은 사실과 다르다. 그러나 전시를 연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가 조사하고 연구하는 문화재는 대개 수중발굴을 통해 발견된 해양 유물로, 대부분 난파와 침몰에서 비롯된 것들이다. 그것을 떠올리며 영상을 보면, 그 가상의 이야기가 유물들의 불운한 내력을 잔잔히 어루만져 보는 평범하고도 따뜻한 손길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어떤 배는 가라앉고, 어떤 항해는 실패한다. 수백년이 지나 뭍 위에서 그 흔적을 마주하는 우리에게, 바다에서 나온 유물들은 더 깊은 메시지를 전해 온다. 과거의 불운이 미래에는 새로운 의미로 전해질 수 있다는 점이다.

울돌목에서 발굴된 고려 시대 물동이. 신지은 제공
울돌목에서 발굴된 고려 시대 물동이. 신지은 제공

유물 하나가 커다란 유적처럼 보일 때가 있다. 전시 1부에 나와 있는 손잡이 달린 물동이 한 점이 그렇다. 이 물동이는 진도 울돌목에서 발굴되었다. 이순신 장군의 명량대첩으로 유명한 그곳이다. 표면에는 숱하게 달라붙어 있던 따개비를 제거한 흔적이 고스란히 남았다. 만들어지면서도 사람 손에 쓰이면서도 없었던 무늬를, 쓰임이 멈춘 바다 밑에 머무는 동안 새로 얻은 것이다. 그 무늬에는 그 물건이 태어나고 거쳐온 시간과 공간이 고스란히 내비친다. 검버섯 핀 노인의 얼굴처럼 보이기도 하는 그 묵묵한 무늬들은 문득 우리가 견뎌온 과거의 불운들이 우리 삶에 어떤 무늬를 남겼는지 돌아보게 한다. 그리고 오래도록 마음 밑에 가라앉아 있는 실패의 기억도 비로소 다시 건져내 바라볼 용기를 준다.

신지은 문화재 칼럼니스트

박물관과 미술관의 문화재 전시나 전통문화를 주제로 한 전시를 소개합니다. 우리 문화재를 사회 이슈나 일상과 연결하여 바라보며, 보도자료에는 나오지 않는 관람 포인트를 짚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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