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릉국제아트페스티벌의 화제작 중 하나인 박선민 작가의 3채널 동영상 작품 ‘귀와 눈:노암’(2023). 식민지시대 수탈과 한국전쟁 당시 학살의 역사를 품은 채로 이제는 주민들의 산책로로 변한 강릉 노암터널의 일상적 풍경을 담담하게 담아내면서 시간 속에 흘러가는 삶을 이야기하는 작품이다. 강릉 시내 옥천동 옛 창고 건물 안에서 상영 중이다. 노형석 기자
터널 속을 사람들이 지나간다. 그네들 삶이 흘러간다.
컴컴한 터널 속 같은 강릉 시내의 옛 창고 안에서 두개의 눈 같은 두 개의 터널 속 사람들을 담은 영상이 은은한 빛을 내뿜으면서 풀려나왔다. 영상에 나오는 터널 속 남녀노소 행인들은 몸체의 모양도 걸음걸이도 제각기 다르다. 고함을 지르면서 뛰어가는 아이들과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면서 지나가는 중년의 남녀, 자전거 타고 휙 지나가는 남자, 우산을 들고 가는 여인, 휠체어를 타고 가는 병자, 다리를 절어 뒤뚱거리면서 갈 길을 재촉하는 할아버지… 캄캄한 화면 안쪽 아치형의 터널 끝으로 밝은 햇살 아래 비치는 푸른 숲길이 보이고 사람들은 끊임없이 그 숲길과 터널 사이를 오가고 있다. 어두운 공간을 걸어가는 사람들의 몸짓과 걸음 자체가 세월의 흐름을 보여준다. 사실 터널은 두개가 아니라 한 터널의 끝과 다른 끝쪽을 포착한 것이다.
이 3채널 동영상은 지난 26일 개막한 2회 강릉국제아트페스티벌(GIAF)의 화제작으로 꼽히는 박선민 작가의 ‘귀와 눈:노암’이란 작품이다. 창고 안쪽 벽면과 측면 벽면에 각각 두개의 터널 영상과 그 안을 거니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여주는 얼개다. 작품의 무대는 강원도 강릉 시내 노암동에 있는 노암터널이다.
작가는 5월부터 8월까지 석달 동안 열차례 이상 현장을 찾아가 터널과 그 안을 오가는 사람들을 찍었다. 이 터널은 일제강점기 일제의 자원 수탈을 위한 영동선 철로의 시설물로 건설됐다가 한국전쟁 중 양민학살의 비극이 벌어졌던 역사적 현장. 철로가 걷힌 뒤로 주민들의 편안한 산책로로 변모했다. 숱한 비극과 삶의 역사를 간직한 이 터널의 역사와 그래도 계속되는 사람들의 삶이 만나 현장에 보이지 않는 역사와 삶의 지층을 만들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현대미술의 거장인 프란시스 알리스의 근작 ‘모래 위 선’. 지난 2018~2020년 이라크 북부를 배경으로 만든 이 영상 작품은 이라크 북부 모술 산간 마을에 사는 아이들이 주역이다. 아이들이 이 지역의 역사적 사건과 주요 인물들의 행적을 읽으면서 벌이는 일종의 구두 역할극이 모술 지역의 황량한 자연을 배경으로 진행된다. 그가 2016년부터 이라크에 진행해온, 어린이를 주인공 삼아 현지의 지정학적 문제를 논하는 ‘어린이들의 게임’ 연작 중 일부다. 노형석 기자
강릉 시내 옥천동 옛 곡물창고(웨어하우스) 상영장은 위로는 환기구가 뚫려있고 정면에 안전 표시가 희미하게 보이는 공간이다. 이 어둑한 창고의 벽면에 사람의 눈과 귀가 된 3채널 영상의 터널, 터널의 아치를 들고 나는 사람들 모습이 담겨서 흘러간다. 특별할 것 없는 행인들의 모습이 그저 아름다웠고, 그 오묘한 미감에 빠져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작업했다고 작가는 털어놓았다.
옥천동 창고 외에 강릉시립미술관과 국립대관령 치유의 숲 등 강릉 시내 6곳에서 국내외 중견소장작가 13명이 펼치는 강릉아트페스티벌은 천년도시 강릉의 역사와 자연을 배경으로 삼는 색다른 시각예술 행사다. 20세기 초 강릉 여인 강릉 김씨가 서울과 인천을 다녀온 여정의 기록인 ‘서유록’을 모티브 삼아 과거와 현재 강릉을 오가는 이들의 삶에 얽힌 이야기와 영감을 형상화한 국내외 작가들의 작품들을 보여준다.
강릉시 교동 강릉시립미술관 1층에 내걸린 홍순명 작가의 ‘서유록-홍씨 이야기’ 연작의 일부분. 100여년 전 강릉에 살던 여성인 강릉 김씨가 대관령을 넘어 서울에 다녀온 37일 간의 여정을 담은 기행문 ‘서유록’을 모티브로 삼은 작품이다. 대관령, 모리재, 두물머리 등 강릉 김씨의 옛 여정을 따라 답사하면서 과거강릉 여인이 보았던 이땅의 풍경을 상상하면서 그린 작품들이다. 노형석 기자
전시는 세월의 흐름에 따라 변화하는 삶과 일상, 시간의 적층성과 그 적층된 시간의 흔적이 우리 삶과 일상에 남긴 것들을 예술의 눈으로 조망한 미디어아트, 설치, 회화 등을 선보인다. 대관령 치유의 숲에선 개념적 퍼포먼스로 유명한 서구작가 티노 세갈의 기획 아래 산책로 데크 중간에 여성출연자가 서서 맞닥뜨린 관객 앞에서 유행가와 동요 등의 다양한 노래를 불러준다.
지역에서 가장 오래된 동부시장의 낡은 상가건물 안에서는 고등어, 임호경, 이우성 등 젊은 작가들이 문을 닫은 해물탕집 공간 등을 배경으로 강릉의 삶과 풍경에 대한 사생과 생각들을 담은 드로잉과 걸개그림 등을 설치해놓았다. 강릉시 교동 강릉시립미술관에서는 홍순명 작가가 ‘서유록’에 나오는 강릉 김씨의 여정을 따라 답사하면서 과거 여인이 보았던 이땅의 풍경을 상상한 다층적 이미지의 그림들을 내걸었다. 독립예술극장 신영에서는 세계적인 거장 프란시스 알리스의 작품 ‘모래 위 선’을 상영한다. 이라크 북부 모술의 산골 마을에 사는 아이들이 지역의 역사적 사건과 주요 인물들의 행적을 읽으면서 벌이는 일종의 구두 역할극이란 점이 주목된다.
강릉은 수천년 전 청동기시대 동예의 선사인들이 정착한 이래로 선조들의 믿음과 유산이 비교적 온전히 보존되어 왔다. 경주처럼 시내 어디를 파더라도 유적과 유물이 나오는 영감의 도시다. 작가들의 가설 전시장이 기존 상가와 함께 어울린 동부시장 건물 바로 옆이 신라시대부터 조선시대에 이르는 옛 건물터 기둥자리와 석열 등의 유적 발굴현장이어서 색다른 감상의 정취를 안겨주었다.
강릉/글 ·사진 노형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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