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근대 여성작가 김명순의 희곡 ‘의붓자식’이 100년만에 처음으로 연극으로 만들어진다. 극중 세 자매로 출연하는 배우 허이레(왼쪽부터), 옥자연, 이경구. 문화다방 이상한 앨리스 제공
첫 근대 여성 작가로 불리는 김명순(1896∼1951)은 비운의 작가였다. 시집을 내고 소설, 평론, 희곡에 번역과 기자로도 활동할 만큼 다재다능했지만 오해와 편견 속에 온당하게 평가받지 못했다. 최근 전집 발간 등 재조명 움직임이 이어지는 가운데 1923년 그가 쓴 희곡이 처음으로 무대에 올려진다. ‘100년 만의 초대’란 부제를 달고 오는 3~5일 아르코예술극장 대극장에서 선보이는 연극 ‘의붓자식’이다.
각색·연출을 맡은 윤사비나 ‘문화다방 이상한 앨리스’ 대표는 “여성 극작가들을 공부하다가 충격을 받아 작품을 제작하게 됐다”고 말했다. 두드러진 활동 이력에 비춰 제대로 알려진 게 없었고, 그나마 부당하게 왜곡된 사실도 많았다. “다른 작가들과 다른 독특하면서도 일관된 글쓰기 철학이 느껴져요. 가부장에 찌든 그 시대엔 받아들여지지 않았을 거란 생각이 들더군요.” 그는 “5년간 김명순을 파고들면서 역사에서 지워진 작가의 작품을 무대 위에 올려놓는 것을 소명으로 삼았다”고 했다.
김명순은 두 편의 희곡 ‘의붓자식’과 ‘두 애인’을 남겼지만 무대화하지 않았다. 낭독공연으로 발표된 적은 있어도 온전한 연극은 처음이다. 아버지의 중혼으로 의붓자매가 된 세 딸의 이야기가 극의 줄기다. 작품에서 김명순 자신의 신산했던 삶이 묻어난다. 주인공 이름이 성실인데, 김명순은 ‘김탄실’이란 필명으로 활동했다. 일본 유학까지 다녀온 신여성 성실은 자신이 원하는 것과 신념을 지키려고 분투하지만 현실의 벽은 높기만 하다. 원작 희곡에선 주인공이 사랑하는 남자마저 빼앗기고 쓸쓸히 죽어가는데, 이번 공연에선 가부장 사회의 속박에 저항하는 주인공의 모습으로 각색했다.
등단제도를 거친 첫 근대 여성작가 김명순(1896~1951)은 오해와 편견 속에 온당한 평가를 받지 못한 비운의 작가였다. 한겨레 자료사진
김명순은 1917년 최남선이 만든 잡지 ‘청춘’의 현상공모에서 단편소설 ‘의심의 소녀’로 입선한 최초의 여성 등단 작가다. ‘창조’의 유일한 여성 동인으로 활동하며, 시와 소설, 수필을 발표했다. 미국 작가 에드거 앨런 포의 작품도 번역해 국내에 최초로 소개했다. ‘매일신보’ 기자로 입사한 조선의 세 번째 여성 기자였던 그는 창씨개명을 거부하고 일제에 저항하는 글을 썼다.
소설가 김동인은 1939년 신여성들이 성적으로 문란하고 타락했다고 낙인찍는 내용의 단편소설 ‘김연실전’을 발표했는데, 김명순이 모델이란 해석이 널리 퍼졌다. 절망한 김명순은 조선을 떠나 일본에서 쓸쓸히 죽어갔다. 작가 정이현은 2002년 ‘이십세기 모단걸-신 김연실전’이란 단편으로 김동인의 악의에 찬 시선을 반박했다. ‘미실’로 유명한 작가 김별아는 2016년 김명순의 생을 그린 소설 ‘탄실’을 발표했다.
임석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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