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단 ‘고래’의 신작 ‘우리’는 50대, 남성 연출가와 40대, 여성 연출가가 겪는 소통의 어려움을 그렸다. 실제로 연출가 이해성-홍예원이 공동으로 연출했다. 극단 고래 제공
지난해 5월이었다. 50대 남성 연출가는 연극계 페미니스트로 주목받아온 40대 여성 연출가에게 전화를 걸어, “페미니즘 관련 연극을 하자”고 제안했다. 여성은 “굉장히 힘들고 욕만 먹을 것”이라며 크게 웃었다. 남성은 “솔직하게 욕이라도 해줄 사람은 당신밖에 없다”고 설득했다. 18개월이 흘렀고, 두 사람은 최근 세대와 젠더, 위계에 따른 소통의 어려움을 그린 연극 ‘우리’를 무대에 올렸다. 두 연출가 공동 연출이다. (11월19일까지 연우소극장)
지난 14일 두 사람이 서울 대학로 ‘예술가의집’에서 마주 앉았다. 극단 ‘고래’ 대표 이해성과 성폭력반대연극인행동 대표 홍예원은 연극에서처럼 위태롭게 논쟁했지만 끝내 접점을 찾아갔다.
두 사람은 이전에 함께 일한 경험이 있다. 이해성이 박근혜 정부의 연극계 검열에 저항하는 ‘광장극장 블랙 텐트’ 극장장을 맡았을 때, 홍예원도 그곳에서 열성적으로 일했다. 그런데 2018년 ‘미투’ 국면 이후 두 사람 관계도 소원해졌다. “가깝던 남녀 선후배 연극인들끼리도 균열이 많았어요. 각자 따로 놀면서 섞이지 않게 됐죠.”
이해성은 “이런 답답한 상황에 대해 문제를 제기해야겠다”고 생각했고, 신뢰하던 홍예원에게 연극을 제안했다. 그에겐 “연극계의 새로운 주체로 등장한 젊은 여성 창작자, 여성 관객들과 소통하는 방법을 배우면서, 가부장 세대에 속한 50대, 남성, 연출가라는 자신의 위치 속에서 페미니즘적 가치를 학습하고자 하는 의지”도 작용했다.
연극은 두 개의 축으로 흘러간다. 하나는 공동 연출자 이해성과 홍예원의 불꽃 튀는 논쟁과 설전의 기록이다. “소통이 너무 힘들어서 포기한 사람들에게 소통을 좀 하자고 말할 때는 정말 많은 고민이 필요해요. 말하는 방식에 대해 말이죠.” (여성 연출가) “일정 부분 그런 입장들도 이해하겠으나 미투 이후 4년이 흘렀잖아요. 이제는 약간 편을 가르는듯한 그런 입장들도 좀 내려놓고 얘기를 좀 해보자고요.” (남성 연출가)
여성 연출가는 이렇게 대꾸한다. “페미니스트들은 적게는 20년, 길게는 4~50년 그 억압의 역사를 온몸으로 받으면서 살았어요. 이제야 우리 언어를 찾았고 우리 목소리를 낸 지 4년밖에 안 됐어요. 근데 내 얘기를 잘 듣지도 않고 동의하지도 않는 사람이 ‘그래, 너희를 존중해. 우리 이제 한 번 얘기 좀 해보자.’ 이렇게 얘기하면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모르겠네요.”
연극에 나오는 이 대사도 이해성과 홍예원의 실제 논쟁을 그대로 옮긴 거다. 이런 식으로 두 연출가의 실제 논쟁이 연극에서 무수히 대사로 재생된다. “제가 그런 식으로 하는 얘기가 아니에요. 자꾸 그렇게 받아들이시면 정말 소통하기가 어려워요.” (여성 연출가) “그걸 자꾸 ‘네가 잘못 이해하고 있다’고 말하지 마시고, 같이 고민을 했으면 좋겠어요.” (남성 연출가)
연극은 리서치와 인터뷰를 쌓아 올려 만든 다큐멘터리 형식이다. 연극 제작의 8할이 공부와 토론이었다. 연출과 단원 13명이 수많은 회의와 토론, 스터디를 이어갔고, 이 모든 과정을 영상으로 기록했다. 함께 페미니즘 관련 책을 읽고 영화를 보며 강연장도 찾았다. 단원들의 지인 50여명을 인터뷰해, 그 가운데 8명의 이야기를 7개의 인터뷰 영상으로 연극에 삽입했다. 이런 과정이 지난해 7월부터 1년 동안 이어졌다. 녹음을 풀어 만든 이해성의 대본은 지난 8월에야 집필이 시작됐다. 연극의 또 다른 축은 극단 단원들이 양자역학에 관한 워크숍을 준비하는 이야기다. 이해성은 “양자역학이 세상을 바라보는 새로운 틀을 제공하듯, 페미니즘이 새로운 패러다임에 대한 메타포의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했다”고 말했다.
극다 고래 대표 이해성(왼쪽)과 성폭력반대연극인행동 대표로 활동해온 연출가 홍예원. 임석규 기자
남녀 연출가의 끝없는 대립은 연극의 결말에서 파국으로 치닫는다. 여성 연출가(배우 박윤선)는 남성 연출가(배우 정나진)와 좁혀지지 않는 견해 차이를 답답해하다 작품 중도하차를 선언한다. 남성 연출가 역시 소통이 막힌 갑갑함에 폭발해 고성을 지르고 만다. 공동 연출가 이해성과 홍예원이 이번 연극을 준비하면서 겪었던 실제 경험 그대로다. 연극은 이렇게 소통이 단절되고 대화가 중단된 막막한 상황 그대로 막이 내린다. 다만, 막이 내리기 직전 영상으로 보이는 문구가 ‘우리는 왜 미움받는가’에서 ‘우리는 왜 미워하는가’로 바뀌는데, 연극의 메시지를 엿볼 수 있다.
암울한 결말에 대한 문제 제기가 이어졌다. 지난 9일 첫 공연 뒤에 아무런 희망의 실마리조차 남기지 않은 결말이 아쉽다는 반응이 많았다. 홍예원은 “공연을 본 지인들이 페미니스트를 너무 공격적으로 그렸다는 얘기를 많이 하더라”고 했다. 관객과의 대화에서 ‘무책임한 결론’이란 반응까지 나왔다. 이해성은 “18개월에 걸친 우리의 노력과 고생이 모두 부정당하는 느낌이 들었다”고 난감함을 토로했다. 결국 내부 의견 수렴을 거쳐 결말을 변경했다. 두 사람이 전화로 다시 대화를 시작하며 소통을 이어간다는 내용이다. “여보세요~대표님!” 홍예원이 걸어온 전화에 이해성은 “어, 얘기해”라고 답한다. 이 부분은 배우가 아닌 실제 두 연출가의 목소리로 넣었다.
연극 ‘우리’는 공동 연출자 이해성과 홍예원의 불꽃 튀는 논쟁과 설전의 기록이다. 임석규 기자
무대 밖에서 만난 두 사람은 수시로 논쟁했지만, 말에 가시가 박혀있진 않았다. 이해성이 “대화를 시작한 건 잘했다고 생각한다”고 하자, 홍예원도 ”이제는 감정 덜 상하면서 밀도 있게 대화할 수 있는 상태는 됐다”며 웃었다. 이해성은 “페미니즘에 대한 백래시의 한 흐름으로 오해받을까 봐 걱정했는데, 공연을 관람한 50대 중년 남성들이 ‘페미니스트들이 왜 그렇게 공격적인지 많이 이해하게 됐다’는 반응을 보였다”고 전했다.
두 사람의 결론은 재공연 얘기로 이어졌다. 이해성이 “여건이 되면 나는 재공연할 뜻이 있는데, 홍예원 연출이 다시는 안 한다고 해서 고민”이라고 하자, 홍예원은 “그건 농담”이라며, “재공연을 한다면 진짜 치열하게 해야 한다”고 말했다.
임석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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