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과 프랑스 합작 공연 ‘제자리’는 제작 과정부터 형식과 내용까지 낯설고 독특하다. 임석규 기자
오른쪽 다리에 의족을 한 비보이가 무대에 오른다. 물구나무를 서고 빙글빙글 돌더니 의족을 벗어던지고 한쪽 다리로 뛰기도 한다. ‘곰’이란 이름의 프리랜서 비보이이자 유튜버인 김완혁이다. 2013년 겪은 사고는 고교 시절 포기했던 비보잉을 다시 시작하는 계기가 됐다.
한국-프랑스 합작 공연 ‘제자리’는 예술의 형식과 본질에 의문을 던진다. 제작 과정부터 형식과 내용까지 낯설고 독특하다. 공연을 총괄하고 대본도 쓴 프랑스 연출가 미셸 슈와이저(65)는 “내 작업은 무에서 시작한다”고 했다. 지난 20일 만난 그는 “특정 분야 예술에 관심이 없고, 연극·무용 등 어떤 장르에 집중하지도 않는다”며 “오로지 각자 다른 모습을 지닌 인간의 다양성을 보여주려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제자리’는 국내 첫 장애예술 공연장인 서울 충정로 모두예술극장에서 24일부터 26일까지 이어진다.
김완혁 주변엔 다양한 배경의 출연자 8명이 각기 다른 자세로 움직인다. 이들이 나누는 대화는 한 편의 추상시를 떠올리게 한다. “우주의 발레에서는 별 하나하나가 서로 붙어 있어. 별들은 서로 닿지 않지만 끌어당겨. 우리는 별들처럼 우주 춤을 출 수는 없지.” 애끊는 아쟁 소리가 배경음으로 흐른다.
무대에 올리기까지는 수많은 공력이 들어갔다. 먼저, 장애인 공연 경험이 있는 기획자를 찾는 일이었다. 장애인문화예술원은 수소문 끝에 프랑스 극단 연출가이자 배우이며, 안무에 무대 디자인도 겸하는 슈와이저를 선정했다. 훈련된 공연자가 아니어도 독특한 협업 방식을 통해 공연을 만들어내는 연출자였다. 아비뇽 페스티벌 등 프랑스 저명한 공연 축제에서 주목받은 이력도 강점이었다.
출연자는 지난해 8월 공모했다. 참가 요건은 ‘자신의 삶을 이야기하고 싶은 사람’, 장애나 비장애, 국적과 나이, 직업과 관계없이 ‘문화와 삶에 관심이 많은 사람’이었다. 오디션을 거쳐 9명이 뽑혔다. 김완혁 외에, 뇌병변 장애를 지닌 사진작가 이민희, 연극배우로 활동하다 병을 앓고 중년이 된 류원선, 발달장애인 무용단을 이끄는 박기자, 장애인문화예술극회 ‘휠’의 부단장 이승규, 무용가 이정민, 연극을 하는 박채린과 김혜린, 아쟁 연주자 정지윤이다. 국내 출연자들과 프랑스 연출진은 3차례 워크숍을 했고, 발표회도 열었다. 음악·춤·몸짓으로 이야기를 공유하는 과정에서 그들은 차츰 서로를 알아갔다.
프랑스 연출가 미셸 슈와이저(65)는 훈련된 공연자가 아니어도 독특한 협업 방식을 통해 공연을 만들어낸다. 모두예술극장 제공.
출연자 선발 기준을 묻자, 슈와이저는 “서로 달라야 한다는 점을 염두에 두고 직관으로 선택했다”고 했다. 그가 출연자들의 개별적 특성에 주목하는 이유가 있다. “극장에선 살아있는 한 명의 사람에게 더 주의를 기울이게 되죠. 극장 바깥에선 서로에게 관심이 없고, 사람을 자세히 들여다보면서 말을 듣고 생각하는 시간과 여유를 가지지 않아요.” 그는 “그건 프랑스나 한국이나 마찬가지”라고 했다. “사람들은 누구나 영웅의 형태를 띠고 있어요. 태어나 죽기까지 삶을 헤쳐나가는 과정을 보면, 한 사람 한 사람이 다 영웅입니다.” 그가 이 공연에서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 가운데 하나로 인용한 프랑스 철학자의 말이다.
프랑스 연출가 미셸 슈와이저가 한-프랑스 합작 공연 ‘제자리’ 출연자들과 연습하는 모습. 모두예술극장 제공
‘선입견의 전복’도 그의 화두 가운데 하나다. “출연자들은 작품 속 배역을 연기하는 게 아니라 자기 자신 그대로 존재합니다. 자신의 선입견에 갇힌 사람은 바로 관객이죠.” 그는 “출연자들이 공연을 만들어가면서 서로에 대해, 이 세상에 대해 또 다른 차원의 관심을 가지게 된다”고 했다.
프랑스에도 별도의 장애인 예술 공간이 있느냐고 묻자, 서부 모흘레란 도시에 있는 국립적응창작센터를 꼽았다. 장애 예술가들이 지닌 ‘연약함’의 맥락 속에서 충분한 시간을 두고 창작할 수 있도록 하는 공간이라고 소개했다. 프랑스는 장애인들에게 일자리를 제공하며 전문 배우로 활동할 수 있게 해주는 2개의 극단도 운영 중이다.
임석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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