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3일 족자카르타 시내 전시공간 이츠레디에서 펼쳐진 광주 청년작가 8명의 그룹기획전 ‘여기, 우리가 만나는 곳’의 개막 전시 현장. 기획자인 이은하 큐레이터(사진 한가운데)가 인도네시아를 대표하는 중견작가인 마리안토(이은하 큐레이터 왼쪽) 등 현지 미술인들과 작품을 둘러보고 있다. 노형석 기자
신나는 케이팝이 전시장 들머리에 울려 퍼졌다.
인도네시아 자바섬 족자카르타의 밤은 활기로 가득했다. 해가 졌는데도 후끈한 열기와 습기가 이어졌지만 대안 전시공간에 차려진 한국 청년 미술의 열기는 날씨에 눌리지 않았다. 환한 표정의 관객들이 삼삼오오 전시장으로 들어왔다. 머리에 두건을 쓴 여성 관객들이 오토바이를 타고 내렸다. 머리를 질끈 묶거나 짧게 깎은 작가들과 예비 작가들, 하얀 얼굴이 벌겋게 탄 노령의 서구 작가들도 차를 타거나 달리거나 걸어서 찾아왔다. 이들은 처음 만나는 한국 현대미술의 독특한 풍경들을 보면서 쉴 새 없이 질문들을 쏟아내고 함께 손을 맞부딪치며 즐거워했다. 음식들이 빚어낸 산수화와 돌이 떨어지는 순간을 포착한 초현실적인 광경, 바위틈 이끼를 휴식처럼 포착한 사진, 광주의 동네 풍경을 그래픽처럼 담은 이미지, 사과를 파 먹는 동영상, 철거된 재개발 현장에서 버려진 기물들을 줍는 미디어아트가 그들 눈앞에 펼쳐지고 있었다.
지난 23일 ‘여기, 우리가 만나는 곳’ 전이 개막한 전시공간 이츠레디 앞마당에서는 저녁 내내 흥겨운 파티와 담소가 이어졌다. 노형석 기자
지난 23일 저녁 자바섬 중부의 고도이자 예향인 족자카르타 시내 전시공간 이츠레디에서 개막 행사를 펼치면서 시작한 광주 지역 청년작가 8명의 그룹기획전 ‘여기, 우리가 만나는 곳(Here Where We Meet)’은 행사를 시작한 오후 5시부터 밤 9시를 넘기는 시각까지 현지 예술인들과 애호가들의 발길이 이어졌다. 참여 작가는 김자이, 유지원, 이세현, 이인성, 임용현, 정승원, 하루 케이, 정정하씨. 광주에 근거지를 두고 다기한 작업을 하면서도 끈끈하게 작가 공동체를 일구며 작업해 온 8명의 작가들은 다채로운 기법과 상상력으로 만든 평면회화, 사진, 동영상, 설치작품 등을 내보였다.
정승원 작가는 현장에 오지 않았지만, 이세현 사진작가와 팝아트적인 음식 산수화를 그리는 하루 케이 작가는 3일부터 미리 현지에 와서 또 다른 후속 작업과 현장 조사를 했고, 다른 작가들도 17일부터 현지에 와서 작품 설치와 현지 미술 공간 탐방, 미술작가들과의 대화 등 바쁜 일정을 소화했다.
지난 23일 전시 개막현장에서 인도네시아 기획자, 작가들과 기념사진을 찍는 출품작가들과 이은하 큐레이터. 노형석 기자
전시장은 큰 편이 아니었지만, 일자형의 들머리 공간과 역 니은(ㄴ)형 본 전시장과 디귿(ㄷ)형의 뒤쪽 뜨락을 모두 전시장으로 활용해 영상, 평면회화, 사진, 설치작품, 미디어아트까지 다채롭게 광주 청년 작가들의 작품들을 감상할 수 있게 꾸며놓았다. 뒤쪽 공간에 사과를 파 먹는 4개의 동영상 작품을 놓은 임용현 작가의 미디어아트 작품을 비롯, 이끼를 소재로 휴식을 주는 식물에 대한 섬세한 관찰을 담은 사진과 이끼를 형상화한 도자기 조각들을 뜨락 마당에 심은 김자이 작가의 작품에는 젊은 작가들이 몰려들어 집요하게 질문하는 모습도 볼 수 있었다.
전시를 꾸린 국제기획자 이은하 큐레이터도 마리얀토 등 찾아온 현지 주요 작가와 기획자들에게 출품작가의 개별적인 작품 특징과 내력을 풀어서 설명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이 큐레이터는 “마리얀토는 물론 현지의 주요 비평가와 미대 교수, 기획자 등이 다수 찾아와 큰 화제를 모았다. 앞으로 계속 교류전과 작가 전시 제의가 이어질 것으로 기대된다”고 했다.
광주 도심 재개발 현장에 카트를 끌고 다니면서 깨어진 집기나 폐기물 등을 수집하면서 묻힌 공간 사라진 공간의 역사를 재 탐구하는 유지원 작가의 다큐 동영상과 동상 같은 일상의 상징들에 낯선 시선을 들이대며 그린 이인성 작가의 회화소품, 대인시장 등 광주의 소박한 생활 풍경을 캐릭터화한 도상들로 풀어낸 정승원씨의 작품들도 주목을 받았다. 이세현 작가는 역사적 내력이 있는 장소를 찾아가 돌을 던지는 등의 행위성이 가미된 화면을 탐구하는 사진 작업을 내보였는데, 그와 별개로 수도 자카르타에서 점점 바다에 침수된 사원과 마을을 포착하는 환경 생태적 작업까지 함께 진행하는 열정을 보여주기도 했다.
지난 22일 오전 만난 인도네시아의 현대미술 거장 해리 도노. 작업실 한쪽에 놓인 1995년 첫회 광주비엔날레 출품작 ‘처형’ 앞에서 촬영에 응했다. 그는 족자카르타 교외에 자리 잡은 작업실에서 한국 작가들을 반가이 맞아주며 대화를 나누었다. 해리 도노는 독재와 학살로 얼룩진 자국의 정치적 현실을 전통과 초현실적 도상을 오가는 키네틱 설치작업들로 표현하면서 세계적인 명성을 쌓았다. 노형석 기자
족자카르타에서 한국 작가들이 레지던시(창작을 위한 거주)를 한 적은 있지만 공식 전시회가 열린 것은 처음이다. 국내에 기반을 둔 기획사인 콜렉티브오피스가 현지 전시 기획사인 아트자카르타&인도아트나우와 협업한 이번 전시는 공공기관의 지원을 일체 받지 않고 한국 기획자와 현지 민간 미술관계자와의 협력으로 재원을 조달해 이뤄낸 성과라는 점에서도 고무적이다.
족자카르타 시내에서 가장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대안공간인 루앙메스 56의 내부 모습. 영상기기 등이 비치된 작업실과 사진암실, 영사실, 회의실 등이 있고 건물 바깥엔 간단히 이벤트를 할 수 있는 계단식 복합공간도 마련되어 있었다. 노형석 기자
인도네시아는 미술생태계가 독특하고 건실하다. 한국을 비롯한 대부분의 나라들이 수도를 중심으로 미술제도와 시장이 형성되는 통례와 달리 규모로는 한참 처지는 지방의 역사도시 족자카르타가 제3의 도시 반둥과 더불어 미술의 양대 거점을 형성한다. 독립 뒤인 1950년대 초 미술작가를 배출하는 인도네시아예술대학이 처음 세워진 곳이고 지금까지 숱한 대표작가들이 수도 자카르타로 가지 않고 이곳에 작업실을 두고 활동 중이다. 에코 누그로호나 헤리 도노 등 인도네시아를 대표하는 작가 대부분이 모두 족자카르타에서 예술을 수학하고 활동했다. 지금도 이곳의 예술인 커뮤니티는 공동체적 기반이 뿌리 깊고 월등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고 한다. 실제로 한국 작가들이 찾아간 루앙메스 56이나 에이스 같은 대안공간에는 각종 영상기기가 설치된 작업실과 사진암실, 워크숍 전용실 등을 갖추고 수시로 국내외 중견 소장작가들은 물론 서구, 동남아 등의 외국 작가들이 수시로 드나드는 국제교류 플랫폼 구실을 하고 있었다.
루앙메스 56과 에이스를 운영하면서 한국 작가들과 일정 내내 함께 한 위모암발라와 랑가 푸르바야는 “이미 상당수 인도네시아 작가들이 한국에서 레지던시와 전시를 했고, 한국 미술인들도 수년 전부터 현지를 찾아와 워크숍 등의 교류활동을 벌이고 있어 양국 미술인들 사이에 더욱 밀접한 교류가 이뤄질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족자카르타/글 ·사진 노형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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