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장수와 약속의 땅’ 전에 나온 이부록 작가의 설치작품 ‘로보다방’(2023). 지난 2016년 가동이 중단될 때까지 개성공단의 북한 노동자들이 선호했던 봉지커피, 초코파이 등의 남한 기호품들을 파는 가상의 이동식 카페공간을 압축적으로 구현했다. 다방 이름의 제목인 ‘로보’란 ‘로동보조물자’의 줄임말로 공단에 입주한 남쪽 기업이 북쪽 노동자에게 주었던 초코파이, 커피, 라면, 동태 등의 복지 물자를 뜻한다.
‘로보다방’?
낯선 명칭에 고개를 갸우뚱거릴 관객들이 많을 것이다. 서울 서촌 통의동에서 대안전시공간으로 성업중인 보안여관 지하1층 들머리에 개설된 이 다방의 이름은 ‘로동보조물자’라는 북한 조어의 줄임말. 소장작가 이부록이 올해 설치작품으로 만든 이동식 카페시설물 제목이기도 하다. 개성공단이 지난 2005년부터 남북합작으로 가동을 시작해 2016년 남북관계 악화로 운영을 접을 때까지 현지 노동자들이 일하면서 간식으로 즐겨 먹고 마셨던 초코파이, 봉지 믹스커피, 콜라 등의 간식류와 기호품들을 파는 가상의 다방 공간을 압축적으로 구현한 작품이다. 폐가구의 나무부재와 합판 등으로 얼기설기 만든 진열장에 ‘오예스’ ‘코카콜라’ ‘빅파이’ ‘초코파이’ ‘커피믹스’ 등 남한의 유명 과자 상표와 포장물이 줄줄이 꽂혀있거나 붙어있는 모습들이 기묘하면서도 처연한 감성의 대비를 이룬다. 체제와 사고를 달리는 남북한의 사람들이 만나 힘겹게 공통의 규칙과 질서를 정하고 조금씩 공생과 공유의 생활문화를 만들어나가던 남북합작 시절의 기억들이 아련하게 혹은 쓰라리게 보는 이의 뇌리를 스쳐간다.
분단 현대사를 색다르게 감각하고 추억하게 하는 이 작가의 작품은 보안여관 지하 1·2층 공간에 펼쳐놓은 이색기획전 ‘약장수와 약속의 땅’의 출품작 중 일부다. 중견독립큐레이터 임종은이 꾸린 이 전시에서 노순택, 리정옥·아키코 이치카와·정리애·미치코 츠치야·치아키 하이바라(팀), 벤자 크라이스트, 아이린 아그리비나, 안유리, 이매리, 이부록, 임수영, 정소영 등 9명(팀)의 국내외 작가들은 한국의 현대사의 질곡을 배경과 소재로 지금 한반도 사람들 앞에 가로놓인 현실을 다기한 미술의 언어로 풀어놓는다. 식민지와 분단, 독재와 혁명, 고도성장 등 일반인도 잘 아는 한국현대사의 주요 열쇠말과 개념들을 기획자와 작가들은 직설적으로 내뱉지 않는다. 제각기 개성적인 방식으로 에둘러 표현했다는 점이 감상의 묘미라고 할 수 있다.
지난 2015년 일본 도쿄 무사시노예술대학과 담을 마주한 총련 산하 조선대학교 사이에 임시로 놓인 목제 다리의 풍경. 수십년간 교류가 단절됐던 두 대학 사이에서 미술 전공 학생들이 합동기획전을 열면서 다리를 놓고 오가는 프로젝트가 성사됐다.
이 전시의 가장 큰 화두이기도 한 한반도 남북간의 대립, 공존의 역사는 일본작가와 재일 총련 작가들이 8년 전 도쿄에서 벌인 공동기획전의 기억을 재구성한 ‘돌연 눈앞이 열리고’란 아카이브 작품에서도 찾을 수 있다. 2015년 도쿄 무사시노예술대학과 담을 마주한 총련 산하 조선대학교 사이에는 처음 목제 다리가 담 위로 가로 놓여 두 학교 학생들이 통행하는 진풍경이 펼쳐졌다. 수십년간 교류가 단절됐던 두 대학 사이에서 미술 전공 학생들이 합동기획전을 열면서 다리를 놓고 오가는 프로젝트가 성사됐다. 처음 열린 다리를 보는 일본 학생과 조선대 학생들의 시각은 복잡하게 엇갈렸고, 그들의 생각 또한 달랐다는 사실을 리정옥, 치아키 등의 이야기와 대화를 담은 기록은 보여준다.
한국 귀화 면접시험에 출제되는 문제를 텍스트로 삼아 한국인 되기의 간극을 드러낸 안유리의 영상작품과 작가 자신의 거주지인 안성 남풍리와 2009년 용산 참사 현장 남일당, 그리고 휴전선 남쪽 지피(GP) 풍경을 함께 대비시키면서 분단현장은 남북한 어디에나 있다고 설파하는 노순택의 사진병풍 등이 나오면서 오늘날 한반도의 지정학적 조건을 새삼 예술가들의 발언으로 각인시켜주고 있다. 단군신화에 나온 마늘을 먹고 곰에서 인간이 된 웅녀 설화를 휘장처럼 늘어뜨린 이미지로 표현하고 인도네시아 민간전승에서 영감받은 마늘 특효약 알리신의 유사과학 이야기를 독특한 소음을 내는 기계장치와 결합시킨 인도네시아 작가 아이린 아그리비나의 설치작품도 강렬한 울림을 전한다. 이 전시의 또다른 매력은 조선 후기 통의동에 있던 조선시대 집터의 발굴 흔적이 지하 전시실 바닥의 유리판 아래에서 비쳐 보이는 가운데 작품들을 감상할 수 있다는 점이다. 과거 시대의 지층을 가로질러 예술로 이땅의 과거와 현재, 미래를 되새김하면서 조망할 수 있는 수작 전시다. 10일까지.
글·사진 노형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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