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7년 등장한 ‘산울림’ 의 삼형제.
한국팝의사건·사고60년 (45) 헛헛한 가요계에 울려 퍼진 개구쟁이 록의 울림
1975년 세밑에 불어닥친 대마초 파동 이후 만 2년은 ‘가슴이 뻥 뚫린’ 듯한 시간이었다. 물론 누구에게나 그런 건 아니었고 어떤 이들에게만 그랬다. 어떤 이들? ‘신중현과 엽전들’, ‘검은 나비’, 김정미 그리고 김민기, 한대수, 이장희, 김정호, 양병집 등의 음악을 즐기던 청년들에게 말이다. 송대관의 ‘해뜰 날’과 최헌의 ‘오동잎’과 조용필의 ‘돌아와요 부산항에’ 등이 물리도록 신물나게 나오던 2년은 그룹 사운드와 포크 음악에 열광하던 이들에게 너무나 건전하고 평온하며 한없이 따분하고 허전한 세월이었다.
불온과 퇴폐의 싹을 고사시킨 ‘당국의 조치’ 이후 꼭 2년만에 이들 청년의 신물을 멈추게 하는 음악이 나왔다. 지난주에 살펴보았듯 1977년 9월의 ‘엠비시대학가요제’, 특히 대상을 차지한 ‘샌드 페블스’의 ‘나 어떡해’는 물리도록 식상한 상차림을 일신하는 사이다와 콜라 같은 음악이었다. 그리고 세 달 뒤 진정으로 새롭고 개운한 메뉴가 등장했다. ‘산울림’이란 낯선 이름의 아마추어 3형제가 투박하게 빚어낸 첫 작품이었다. ‘아니 벌써’로 시작해 ‘아마 늦은 여름이었을 거야’ ‘불꽃놀이’ ‘문 좀 열어줘’를 거쳐 ‘청자(아리랑)’로 마무리하는 아홉 가지 요리묶음은 애피타이저도 디저트도 필요 없는 충격적인 정수(精髓)였다.
3형제는 용감했다. 이들은 학원에 다니지도 교본에 의존하지도 않고 변변치 않은 조리도구로 ‘집’에서 지지고 볶으면서 자신들만의 레시피를 만들어냈다. 그렇게 빚어낸 레퍼토리가 데뷔하기 전까지 100여 가지에 달했다. 비록 데뷔 직전에 열린, 아마추어 대학생들끼리 경합하는 문화방송 주최 경연대회에서는 예선 탈락의 고배를 마셨지만, ‘둘째’ 김창훈이 레시피를 만든 ‘나 어떡해’가 대상을 차지한 일은 자신감을 불어넣기에 충분했다. 가요계엔 의미심장한 전조였던 셈이고.
평지돌출 격으로 솟아오른 ‘산울림’은 평지풍파를 일으켰다. 헛헛해하던 청년들은 산울림의 작품을 맛보자마자 오래 굶주린 사람처럼 열광했다. 당시 주류를 장악한 프로페셔널들의 노련한 레퍼토리와 비교해 형편없는 매무새와 때깔을 가진, 두서없고 볼품없었지만 ‘산울림’의 작품은 불티나게 팔려나갔으며 주문이 끊이지 않았다. 1977년 12월 데뷔 후 1년여 동안 다섯 종이 넘는 새 작품집이 쏟아져 나올 정도였다. 그 중에는 ‘개구장이’ 등 어린아이들을 위해 선보인 메뉴도 있었는데, 이 신메뉴를 찾는 이들은 애 어른이 따로 없었다. ‘산울림’ 이후 비슷한 퍼즈 톤의 기타와 하드 록 스타일을 앞세운 캠퍼스 그룹 사운드들이 대거 등장해 인기를 끌었던 사실은 사족이다.
‘산울림’의 음악은 전혀 새로운 스타일은 아니었다. 그들의 음악에서 1960년대와 1970년대 초 영미권의 록 음악과 포크, 특히 사이키델릭, 하드 록·헤비 메탈의 재료를 찾기는 어렵지 않다. 또 ‘산울림’의 작품에서 신중현으로 대표되는 한국 그룹 사운드 음악의 영향을 배제하기도 힘들다. 하지만 어디 하늘 아래 새로운 음악이 있던가. 다른 많은 혁신적인 밴드들이 그렇듯 ‘산울림’은 계승과 단절, 영향과 배제의 양면성을 아우르며 자신들만의 어법으로 새로움을 새겼다.
하지만 ‘산울림’은 ‘노래는 좋지만 연주력은 형편없다’는 이유로 정작 록 음악계에서는 오랫동안 과소평가된 측면이 있다. 기교와 테크닉에 경도된 프로페셔널리즘의 망령이 오래 지배한 탓이다. 데뷔한 지 20년 후인 1990년대 후반에야 비로소 홍대 앞에 모여든 아마추어 밴드들과 음악 마니아들을 중심으로 ‘산울림’을 재평가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내 마음에 주단을 깔고’의 한 구절처럼 “한 마디 말이 노래가 되고 시가 되”듯 빚은 ‘산울림’의 음악은 곁눈질하지 않고 ‘자기만의 레시피’를 부단히 창작함으로써 새로움을 이루어낸 ‘용감한 아마추어’의 전범이자 전설이 되었다.
이용우/대중음악평론가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