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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음악·공연·전시

명동 떠나 ‘새로운 아지트’ 신촌서 노닐다

등록 2006-05-03 22:41수정 2006-05-04 10:05

정태춘의 싱글 음반(1978)
정태춘의 싱글 음반(1978)
한국팝의사건·사고60년 (50) 정태춘·유지연·양병집, 상이한 음악을 잇는 동일한 키워드, 신촌
평택 대추리의 미군기지 확장반대시위 현장. 이곳에는 매주 토요일 저녁 ‘비닐하우스 콘서트’가 열린다. 이 콘서트의 중심에는, 이곳이 ‘자신의 고향이자 음악적 뿌리’라며 고집스레 서 있는 한 가수가 있다. 그는 다름 아니라 정태춘이다. 기왕에 뚝심 있는 투사적 이미지로 각인된 가수이기에, 그의 현재 행보 역시 지극히 자연스럽게 보인다. (지금이야 새삼스러운 일이 되었지만) 10년 전까지도 있던 음반의 사전심의제를 철폐한 것도 그 아니었으면 불가능했을지 모른다.

그런 그에게 또 다른 이미지가 있(었)다. ‘시인의 마을’, ‘촛불’처럼 서정성 짙으면서도 토속적 톤으로 일렁이는, 그러나 현재에는 이를 스스로 부정해버린 ‘그때 그 시절’ 이야기다. 이 두 곡이 맨 처음 실린 1978년 첫 번째 앨범 〈정태춘의 새노래들〉의 성공에 대해서는 1979년 문화방송 신인가수상을 수상했다는 것과, ‘촛불’이 동양방송(TBC) 방송가요대상 작사부문상을 받았다는 것으로 대신하자. 이 음반은 지난 회에 소개한 서라벌 레코드에서 발표된 것이다. 참고로 이곳에서 나온 정태춘이나 산울림 등의 ‘싱글’ 음반도 희귀 수집대상임이 분명하다.

물론 영미권 포크이면서도 토속적이고 질박한 분위기에 국악이나 민요적 감수성을 버무린 정태춘의 음악 세계는 2집 〈사랑과 인생과 영원의 시〉(1980)와 3집 〈우네〉(1982)에서 더 잘 드러났다. 당시 상업적으로는 불운했던 음반들이었지만 정태춘의 향후를 잘 알려준 예광탄 같은 음반들이다. 뮤지컬 〈춘향전〉의 수록곡이었던 ‘그네’, 전통적 가락과 장단이 구수한 목소리에 얹힌 ‘서해에서’처럼 1집에서도 정태춘의 음악적 향방이 예시된 바 있지만, 3집에 이르면 국악기를 도입하는 등 그의 ‘본심’을 본격적으로 드러낸다. 가령 ‘여드레 팔십리’의 반주는 1집에서는 양악 버전이었지만 3집에서 국악 버전이다. 물론 정태춘의 네 번째 앨범이자 박은옥과 함께 한 첫 앨범을 지구 레코드에서 발표하면서 질박하면서도 진솔하며 아름다운 서정을 더욱 대중적으로 각인시키며 꽃피우게 된다.

그런데 앞서 정태춘의 첫 음반에 실린, 영롱하고 섬세한 핑거링을 얹은 기타 솜씨는 누구의 것일까. 이는 유지연이라는, 1980년대에는 이정선과 더불어 대표적인 어쿠스틱 기타리스트로 손꼽혔던(이후에는 CCM 음악계로 방향전환했던) 인물의 것이다. 자신의 곡을 담은 음반들도 발표했는데 2집 ‘사랑과 평화’(1집에는 제목도 가사도 다른 ‘가을 바람’으로 실림)가 잘 알려진 곡이다. 연주음반 〈어쿠스틱 기타로의 초대〉(1986)에는 엘비스 프레슬리, 닐 영, 블랙 사바스 등의 곡을 싣기도 했는데 이러한 유지연의 포크 성향과 정태춘의 궁합이 잘 맞았는지는 다소 논란의 여지가 있겠지만.

그런데 평택에서 상경한 정태춘이 유지연과 조우한 배후에는 양병집이 있었다. 한국 모던 포크계의 대부 중 한 사람인 그가 ‘음악 카페’를 차려, 후배 뮤지션들이 설 무대를 마련해주고 후배 음악인들을 양성했다는 사실은 또 하나의 전설이다. 1970년대 중반에 ‘OX’(오엑스 혹은 옥스)를, 70년대 후반에 ‘톰스 캐빈’을, 그리고 1980년대 초반에는 ‘모노’(Mono) 등을 운영했다. 그가 기른 (박호준과 김광민 등이 있던) ‘동서남북’도 모노를 거쳤다. 뿐만 아니라 최성원과 전인권이 후일 폭발의 주역이 될 들국화를 예비하던 곳들이었고, 남성 2인조 ‘해바라기’ 역시 ‘뜨기 전’까지 활동한 보금자리였으며, 김현식도 듀엣으로 노래했다는 후문이 있는 곳들이다.

그런데 양병집이 1970년대 중반 문화적 음악적 메카 명동을 떠나 새로운 독립을 꿈꾸며 무작정 운영하던 카페가, 그리고 그곳을 거쳐간 뮤지션들이 있던 곳은 어디인가. 다름 아니라 신촌이다. 그 양상은 다를지언정 문화적으로 중요한 곳이라는 사실은 예나 지금이나 비슷한가 보다. 지금처럼 휘황하진 않았지만 조그마한 카페들이 버섯처럼 이곳저곳 돋아 있던 곳. 디오니소스적 보헤미안들이 술잔을 기울이며 자유와 낭만을 논하던 곳. 무언가 새로운 음악을 타진하던 새로운 아지트. 그곳에서 노닐던 예술가들을 편의상 ‘신촌파’라고 부를 것이다. 이제 그들을 만날 차례다.

최지선/대중음악 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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