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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음악·공연·전시

신촌 지하의 암중모색, 결과는 ‘제3의 길’

등록 2006-05-10 21:48

신촌파의 슈퍼 그룹 장끼들의 데뷔 음반. 아래 왼쪽부터 엄인호, 박동률, 라원주이다. 골수 신촌파와 미8군 무대 계보와 캠퍼스 그룹 사운드의 ‘따로 또 같이’
신촌파의 슈퍼 그룹 장끼들의 데뷔 음반. 아래 왼쪽부터 엄인호, 박동률, 라원주이다. 골수 신촌파와 미8군 무대 계보와 캠퍼스 그룹 사운드의 ‘따로 또 같이’
한국팝의사건·사고60년 (51) ‘한국 팝의 얼터너티브’ 신촌파의 옛이야기
신촌 하면 대부분 ‘젊음의 거리’란 이미지를 떠올린다. 연세대 이화여대 서강대 홍익대 등 여러 대학이 지근거리에 있어 대학생들로 넘쳐나기 때문이란 부연 설명은 핀잔 듣기 십상인 사족일 것이다. 청년들의 거리인 만큼 음악과 무관하지 않(았)으리란 추측도 마찬가지.

1990년대 세대라면 신촌 하면 라이브 클럽, 펑크 록, 인디 밴드 같이 ‘신촌-홍대 앞 인디 씬’과 관련한 기억들이 자연스럽게 떠오를 것이고, 1980년대 세대라면 신촌 블루스, 들국화 등 속칭 ‘신촌 언더그라운드’와 연관된 추억들이 몰려올 것이다.

요컨대 신촌은 언제부턴가 젊고 새로운 음악을 분만하는 대표적인 지역으로 자리매김해 왔다는 말이다. 그런데 언제부터일까. 이름만으로 많은 걸 상징하는 ‘신촌 블루스’에 주목해 보자. 신촌 블루스가 엄인호와 이정선을 주축으로 1986년에 결성되었고 1988~89년 3종의 앨범을 발매하며 적잖은 인기를 모았다는 사실은 알 만한 사람은 다 알지만 상기해둘 필요가 있다. 조금만 뒤집어 보면, 그렇게 대중의 시야에 들어와 각광을 받기 이전, 즉 1980년대 중반 이전에 ‘신촌 음악’의 역사가 시작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기 때문.

거슬러 올라가면 1970년대 중반부터 문화 예술과 인생을 논하며 자유와 낭만을 희구하는 일군의 젊은이들이 신촌에 모여들기 시작했다. 제법 촉망받는 신진 예술가부터 예술가연하는 룸펜까지 여러 층이 어울렸는데 그 구분은 어렵거나 무의미했다. 어쨌든 이들 보헤미안 히피가 OX(오엑스), 츄바스코, 4O9(포 오 나인), 하렘, 러시, 톰스 캐빈, 모노 등 수없이 명멸한 음악감상실 또는 카페를 거점 삼아 ‘밤드리 노닐’며 퍼마시고 좌충우돌 교감했다는 얘기는 이미 한 바 있다.

그렇다면 신촌파는 구미에서는 이미 1970년대의 문턱에서 작파된 히피 반문화의 꿈을 한반도 남쪽에서 이어간 이들일까. 칼로 무 자르듯 말할 수 있는 얘기는 아닐 것이다. 하지만 이들이 지하에서 암약한 1970년대 중반부터 십여 년간, 신촌이 ‘주류의 대명사’ 명동에 대해 얼터너티브한 공간으로 기능했음은 분명하다. 이들의 대안적 모색과 실천은 1980년대 중반 들국화의 거짓말 같은 성공을 기점으로 주류 음악의 대안으로 인기를 얻었고 이는 이른바 ‘신촌 언더그라운드 폭발’로 우리 기억 속에 선명하게 남아있다.

그런데 지하에서 암중모색하던 시기와 대중적으로 성공한 시기 사이에 신촌파의 음악적 색채나 태도를 엿볼 수 있는 증거는 없을까. 신촌파의 일면을 표상하는 하나의 음반이 있다.

장끼들이란 낯선 이름의 밴드가 1981년에 내놓은 데뷔 음반이 그에 해당하는데, 멤버와 음반 수록곡의 면면을 보면 거의 ‘악’ 소리가 나올 정도다. 신촌 블루스로 유명하게 되는 엄인호, ‘세상 모르고 살았노라’ 등 활주로-송골매의 알토란 같은 곡들을 작곡한 라원주, 남궁옥분 등을 스타덤에 올린 인기 작곡가로 활약하게 되는 박동률이 밴드의 주축을 이뤘다. 수록곡 또한 ‘세상 모르고 살았노라’ ‘탈춤’ 등을 메들리로 엮은 트랙을 비롯해 ‘사랑 사랑 누가 말했나’ ‘골목길’ ‘(네 마음은)바람인가’ 등 이후에 크고 작은 히트를 기록한 곡들이 실려 있으니 말 다 한 셈이다.

이 음반은 한마디로 신촌파의 슈퍼 그룹이랄 만한 밴드의 기대작이었다. 하지만 지금 장끼들을 기억하는 이들이 별로 없는 데서 보듯, 파란을 일으키는 대신 까맣게 잊혀진 불운한 음반이다. 하지만 레게를 선구적으로 응용하고(‘별’) 한국적 블루스를 선도적으로 본격화하는 등(‘나그네의 옛이야기’) 당시로서는 매우 참신한 아이디어와 어법이 돋보이는 음반이었다.


비록 전체적으로 고른 성취를 이루었다고 볼 수는 없고 시장의 반응 역시 차가웠으나, 훗날 빛을 본 멤버들과 수록곡의 이름값 때문에 이채로운 음반에 머물 만한 작품은 아니다. 이 음반이 중요하다면 당대 주류 음악과는 다른 길을 모색한 신촌파의 음악적 특색과 지향을 지문처럼 보여주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그들이 외국 음악 스타일을 한국적으로 변용함으로써 사대와 배척이 아닌 ‘제3의 길’을 모색했음을 알려주기 때문이다.

이용우/대중음악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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